최근 중국 후난(호남)성 창사(장사)에서 한국인 5명이 크게 다친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승합차가 버스에 받혀 약 30m 급경사 언덕으로 두바퀴나 굴러 논에 처박힌 사고였다.

승객의 얼굴에서 피가 흘렀고,신음소리가 들렸다.

얼마 후 여기저기서 손전등을 든 마을 주민들이 나타났다.

신음하는 승객들을 먼저 구출하는게 인지상정. 그러나 손전등 빛은 차 내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멀거니 사고현장을 바라보고 있었고 일부는 언덕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나중에 그들이 흘린 물건을 줍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에게서 타인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찾아볼수 없었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 중국인의 모습은 베이징(북경)에서도 자주 목격된다.

교통사고로 다친 사람이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데도 쳐다보기만 한다.

거리에선 먼저 차머리를 들이미는게 임자다.

버스정류장 병원등에서 줄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끊임없이 앞에서 새치기를 한다.

그들은 왜 부상자를 외면했을까.

전직 외교부 고급관리였던 왕(68)선생은 이에 대해 지난66년부터 10년여간 중국을 혼돈속으로 몰아넣었던 문화대혁명의 후유증이라고 진단한다.

베이징 토박이인 그는 문혁 이전 베이징 젊은이들은 버스에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할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지녔다고 했다.

당시 베이징은 깨끗하고 아름다웠으며 질서와 정,그리고 신뢰가 있는 도시였다고 회고했다.

문혁 10년의 혼돈속에서 "내가 나를 보호하지 않으면 당한다"라는 의식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고 왕 선생은 말한다.

내 가정을 보호하기 위해 돈으로 권력을 사고,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 풍조가 굳어졌다는 설명이다.

관가에 만연하고 있는 부정부패,서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불신풍조가 여기서 비롯됐다.

그는 문혁시절 홍위병에게 쫓겨 광시(광서)성 한 농촌의 돼지우리에서 3년을 보내야 했던 일을 돌이키며 몸을 떨기도 했다.

문혁 당시 젊은 학생이었던 홍위병 역시 역사의 피해자다.

40대 후반~50대 초반의 그들은 지금 중국기업및 행정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샤강(하강.해직)의 첫 대상이다.

책을 잡아보지 않은채 학창시절을 보내야했던 그들은 후배들로부터 퇴물로 인식되고있다.

이로인해 세대 공백현상마저 일어나고 있다.

중국사회에 문혁의 그림자가 아직도 검게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베이징=한우덕 특파원 woodyhan@k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