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바로 뒤에 위치한 미 수출입은행.

평소 같으면 별 주목을 받지 못하는 곳이지만 이번 주, 워싱턴 정가는 물론
세계의 이목이 이곳에 집중됐다.

시베리아 유전개발회사인 러시아정부 소유의 튜멘석유회사(Tyumen Oil)가
서방에 신청한 자금 5억달러에 지급보증을 서주려는 미수출입은행에 대해
빌 클린턴 행정부가 갑작스레 제동을 걸고 나왔기 때문이다.

"미국의 국익에 배치된다고 판단할 경우, 미 국무장관은 수출입은행의
자금공여를 중지시킬 수 있다"는 법조항을 들고 나온 것.

실제로 메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지난 화요일 "수출입은행이 당분간
러시아에 지급보증을 하지 않는 것이 국익에 합치된다"는 요지의 서한을
보냈고 수출입은행이사회는 이같은 행정부의 제동에 굴복, 이미 기정사실화
된 지급보증을 철회하기로 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행정부가 제동을 걸고 나온 표면적 이유는 튜멘석유회사가 서방이 요구하는
구조조정을 외면하고 있을 뿐 아니라 튜멘석유가 BP, 아모코 그리고 조지
소로스가 소유한 경쟁사를 부정한 방법으로 인수하려 드는 등 불공정 행위를
일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나 이번 지급보증철회의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최근 악화일로에 있는
미-러시아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는 게 워싱턴의 해석이다.

옛소련 붕괴 이후 미국의 독주에 적지 않은 소외감을 느껴온 러시아가 최근
중국지도부와의 정상회담에서 연대를 과시하며 간접적으로 미국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것이 그 한 예라는 설명이다.

더욱이 서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체첸에 대한 군사행동을 강행하고 있는
러시아에 대해 무언가 경고나 시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가 미국으로
하여금 수출입은행카드를 들고 나오게 했다는 지적이다.

러시아인들이 최근 선거에서 우파에 승리를 안겨줌과 동시에 체첸 전쟁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간접적으로 표명한 것도 미국쪽의 "화요일 대반란"을
유도한 요인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이 과정에서 피해를 본 것은 팔 비틀린 수출입은행.

행정부는 전통적으로 수출입은행의 의사를 존중해 왔다.

과거 적용된 사례가 없는 조항을 들고 나와 다 된 밥에 재뿌리는 행정부의
처사가 못내 서운하다는 것이 수출입은행 내부의 분위기다.

실제로 이번 지급보증건은 수출입은행이사회가 지난 5월과 6월 이미 잠정승
인 한 사항일 뿐 아니라 30일간의 의회검토기간도 거친 것이어서 체첸 등
최근의 돌출사태만 아니었으면 차관자금이 이미 러시아인들의 손에 들어가
있을 만한 것이었다는 설명이다.

제임스 하몬 수출입은행장이 기자회견에서 "수출입은행의 목적은 수출을
통해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고 튜멘석유에 대한 지급보증은 바로
이같은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말한 대목은 은행의 행정부에 대한 보이지
않는 반발을 반영한 것이다.

화요일 전까지만 하더라도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등 유력지 또한
"행정부의 급제동에도 불구하고 상업성과 은행의 독립성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수출입은행이 행정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지 모른다"고
보도했다.

평소 같으면 화요정례이사회는 한시간도 걸리지 않는다는 게 은행의
설명이다.

그러나 오후 3시면 결론이 날 것이라는 은행측의 발표에 맞춰 보도자료를
기다리던 기자들도 심야까지 계속된 마라톤 토론에는 모두 손을 드는 모습
이었다.

미국은 이번 지급보증을 "완전히 없던 것"으로 한 것은 아니다.

"당분간"이라는 용어를 사용, 협상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규모도 5억달러에 불과하고 현금제공도 아닌 지급보증문제를
가지고 미국이 러시아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려 문제를 더 꼬이게 만들었다"는
지적도 없지는 않다.

어찌됐건 미국과 러시아라는 고래싸움에 미국 수출입은행의 오랜 자존심과
독립성이 손상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디를 가든 "정경의 완전분리"라는 명제는 손에 넣기 어려운 것인가 보다.

< 워싱턴 특파원 양봉진 http://bjGlobal.co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