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빈한 이웃을 잊지 맙시다"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미국의 주요 신문들은 요즘 각 면 귀퉁이마다 이런
글귀를 적어넣고 있다.

해마다 세모를 맞으면 으레 지면을 장식해 온 캠페인 구호의 하나지만,
요즘의 분위기는 좀 다르다.

불우한 이웃에 대한 미국인들의 온정이 식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경제가 9년째의 초장기 호황을 맞아 곳곳에서 풍요가 넘실대고 있는
현실에 비춰보면 이변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사업단체들이 내놓는 통계를 보면 이건 엄연한 사실이다.

구호기관 연합체인 인디펜던트 섹터에 따르면 89년 2.5%를 기록했던 미국
가계의 연간 소득 대비 불우이웃 돕기 헌금 비율이 작년에는 2.1%로
낮아졌다.

금액을 불문하고 이웃돕기 헌금을 한 가정의 비율이 89년에는 75.1%였으나
지난해엔 70.1%로 뚝 떨어졌다.

평균 헌금액수 역시 4년 전의 2백71달러에서 작년에는 2백50달러로 뒷걸음질
쳤다.

이처럼 자선의 손길이 적어짐에 따라 구세군, 유나이티드 웨이 등 주요
기관들마저 예산 부족으로 구호를 요청하는 극빈자 단체들을 그냥 돌려
보내는 사태가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미국인들의 전반적인 사회 기부금 자체는 오히려 늘고
있다는 점이다.

마이크로 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가 자신의 재단을 통해 수십억달러씩을
수시로 기탁하는 등 미국인들의 씀씀이 자체는 결코 인색하지 않다.

미국인들의 총 대외 기부금은 지난해 1천7백50억달러로 전년에 비해 11%나
늘어났다.

하지만 이들 기부금은 오페라 발레 박물관 대학 등 특정 예술인들이나
기관에 지정 기탁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진 자들의 풍요"를 한껏 즐기기 위한 기탁 행위에 전체 기부금의 90%
이상이 집중되고 있다.

심지어 "학대받는 동물을 보호하기 위한 기금" 같은 데는 거액을
쾌척하면서도 불우 이웃 성금은 외면하는 미국인들이 수두룩하다는 보고서도
있다.

미국인들이 이처럼 불우 이웃에 인색해지고 있는 까닭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다.

그 중에는 "지나친 풍요의 결과로 많은 미국인들이 고립적이고 오만해졌으며
오로지 자신의 삶을 즐기는 데만 탐닉하게 됐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 사정은 그렇다치고 "IMF 터널"을 빠져나와 다시 거리 곳곳이 흥청대기
시작했다는 한국의 연말 풍경은 어떤 모습인지 짚어볼 시점일 성싶다.

< 뉴욕=이학영 특파원 hyrhee@earthlink.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1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