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중국본부 자금부에서 일하고 있는 P과장은 최근 거래은행인 공상은행
으로부터 색다른 제의를 받았다.

텐진지역 삼성 관계사들의 자금거래를 일괄적으로 맡겨달라는 요구였다.

공상은행은 이와 함께 외환거래 및 런민삐 대출상의 우대 조건을 제시했다.

P과장은 주거래은행 제도가 없는 중국에서 이같은 제의를 받은지라 적잖이
놀랐다.

그는 기업에 대해 줄곧 고자세를 보여왔던 공상은행이 대출 마케팅에
나서는 것을 보고 중국 금융계가 변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꼈다고 말한다.

공상은행이 외국기업인 삼성을 상대로 대출 세일에 나선데는 이유가 있다.

중국 각 은행에는 지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이 쌓여있다.

국내총생산(GDP)의 60% 이상에 달하는 5조9천억위안의 가계예금이 은행에
몰려있다.

옛 방식으로라면 정부의 지령(계획)에 따라 자금을 방출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제는 투자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하는 터라 수익률 및
안정성을 감안해야 한다.

이 은행은 결국 투자위험도가 높은 국내기업 대신 안정적인 외국기업을
선택한 것이다.

공상은행은 자국 금융시장을 야금야금 파고들고 있는 외국계 은행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

외국계은행이 런민삐 업무를 취급할 수 있는 지역은 현재 선전과 상하이
푸동지구 두 곳 뿐이다.

그러나 베이징 텐진 등 연안 도시도 머지않아 런민삐 영업규제를 풀겠다는게
인민은행(중앙은행)의 방침이다.

공상은행은 외국은행이 인민폐영업을 시작하기전 외국기업을 잡아야 한다.

중국 각 은행들은 정부관리란 틀에서 벗어나 홀로서기 연습에 한창이다.

독립 경영체제를 보장하되 책임은 각 은행이 저야 한다(다이상룽
인민은행장)는 정책 때문이다.

중국 금융당국은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에 대비, 금융기관의 체질 강화를
독려하고 있다.

중국 은행의 체질 개선 노력은 업무전산화 열풍에서도 발견된다.

건설은행 베이징 지점은 최근 인터넷 금융거래시스템을 가동했다.

지점 고객들은 인터넷을 통해 계좌조회 자금이체 수출입업무 등을 처리할 수
있게 됐다.

건설은행은 이 시스템을 광조우 상하이 선전 등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중국은행은 고객의 주식투자 지원을 위해 인정콰이처라는 시스템을
개설하기도 했다.

중국 은행의 전산화 열기로 IBM 오라클 등 외국 정보기술업체는 지금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금융전문가인 천장쉬 박사는 중국 금융개혁이 구조적 모순 해결에서
서비스 질 향상 단계로 옮겨가는 과정에 있다고 분석한다.

그동안 취해진 금융개혁은 중앙은행 독립, 상업은행 출범, 주식.채권.콜시장
설립, 금융시장 개방 등 제도 정비에 초점이 맞춰졌다.

향후 개혁은 경쟁력 향상을 위한 은행 내부 개혁이 될 것이라는게 천 박사의
말이다.

그렇다고 중국 금융산업이 하루아침에 경쟁 체제를 갖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금융권을 둘러싼 경제 환경이 최악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건설은행 농업은행 중상은행 중국은행 등 핵심 상업은행들은 국유기업에
물린 부실채권으로 허리가 휠 지경이다.

대출액의 약 20%가 불량채권으로 추산된다.

중국정부는 이들의 부실채권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최근 자산관리공사인
신다를 설립, 1조2천억위안에 달하는 부실채권 인수에 나섰지만 효과는
미지수다.

자금이 은행으로만 몰려드는 것도 문제다.

은행 이자소득에 20%의 세금을 부과하겠다는 정부 방침에도 불구하고
은행예금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디플레로 소비가 위축된데다 마땅한 투자처가 없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채권 부실화를 우려, 기업 대출을 꺼린다.

전형적인 신용경색 현상이다.

중국 금융이 제자리를 찾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각 은행들은 속도는 느리지만 멈추지 않는다는 자세로 변신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 베이징=한우덕 특파원 woodyhan@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