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의 "경제 해독법"은 일반의 상식을 뛰어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난 20일 미국 상무부가 발표한 "3월중 무역적자 사상 최대규모"에 대한
반응이 단적인 예다.

미국의 3월 무역적자는 전월보다 8억달러 이상 늘어난 1백22억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월가 사람들은 이 발표를 "호재"로 받아들였다.

이날 다우존스 주가지수는 무려 116.83포인트나 뛴 9,171.48을 기록했다.

월가가 엄청난 무역적자를 "호재"로 받아들인 이유는 경기과열 억제효과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3월의 적자만으로도 올 미국 경제성장률이 0.25%포인트 가량 둔화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월가의 관심은 "경기과열 여부"에 있을 뿐 무역적자 규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무역적자 비율이 2.5%선을 기록하고 있는 데도
그렇다.

"무역적자 때문에 환란을 겪게 됐다"는 한국의 GDP대비 무역적자비율이
지난해 1.9%였던 데 비추어도 미국의 무역적자 부담은 결코 가벼울 리 없다.

그럼에도 월가의 투자자들이 꿈쩍 않는 이유는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어서다.

무역 적자를 메우고도 남을 만큼 미국 금융시장에 외국의 돈이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돈줄의 심장부"로 불릴 만큼 강력한 경쟁력을 갖고 있는 금융.자본
시장이 건재하는 한 무역적자는 크게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실제로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금융 위기에 빠진 뒤 이들
지역에 잠겨 있던 각국의 돈이 월가로 속속 몰려들고 있다.

미국 재무부가 발행한 30년만기 국채에만도 1조1천3백억달러가 넘는 외국
자본이 투자돼 있다.

전체 발행 잔고(3조4천억달러)의 33%를 넘는다.

외국인들의 수요가 몰리는 바람에 지난해 연 7.1%를 넘었던 30년만기 미
재무부 채권 수익률은 최근 연 5.8%대로 내려 앉았다.

금리가 하락하고 있는 데도 외국 돈줄의 "미국행"은 멈출 줄 모르고 있다.

국제 금융시장이 불안해지면 질수록 뭉칫돈의 "안전한 둥지(safe haven)"
로서 미국 금융시장은 더욱 위력을 발휘한다.

연 10%가 넘는 금리로도 외국 자금을 구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는 한국
으로서는 부러운 노릇이다.

미국이 부럽기는 일본도 매한가지다.

엄청난 무역흑자를 싸 놓고 있으면서도 금융산업 낙후로 국내 일반예금자들
의 돈까지 미국계 은행에 빼앗기고 있는 게 요즘 일본의 현실이다.

미국 금융산업이 이처럼 탄탄한 경쟁력을 확보하기까지는 나름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특히 70년대와 80년대에 몇 차례의 고비를 넘기면서 미국 은행들은 위험
관리에 힘썼고 금융당국은 철저한 감독으로 대형 부실사고를 막았다.

이런 노력이 미국,특히 금융 중심도시인 뉴욕을 "세계의 금융수도"로
일구어 냈고 무역적자를 극복할수 있는 인프라가 됐다.

미국의 이런 모습은 금융산업이 왜 실물부문 못지않게 중요하며 경제문제를
풀어가는 첫 단추인지를 웅변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 뉴욕=이학영 특파원 hyrhee@earthlink.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5월 2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