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이 베를린 맞습니까"

한 10년여만에 동베를린을 찾은 방문객이라면 누구나 이같은 물음을
던지게 된다.

90년10월 통일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가 너무나 달라서이다.

통일이전 베를린의 중심을 가로지르던 거대한 잿빛장벽의 동쪽은 그야말로
회색도시.

이미 빛이 바래버린 낡은 건물들과 사회주의 특유의 무표정한 사람들.

마치 거리 전체에 짙은 안개가 드리운 듯 장중했던 곳이 바로 과거의
동베를린이었다.

하지만 통일후 7년이 지난 지금 베를린은 유럽에서 가장 활력이 넘치는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

베를린 시내에 들어서면 우선 사방에서 울려퍼지는 요란한 굉음에 놀라게
된다.

거리 곳곳엔 "돌아가시오"란 표지판이 널려있다.

"서유럽에서 가장 동쪽, 동유럽에서는 가장 서쪽".

다시말해 유럽의 한가운데 위치한 베를린을 명실상부한 통일독일의
수도이자 유럽의 실질적인 중심으로 도약시킨다는 베를린 프로젝트가
베를린의 모습을 완전히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베를린 개발 청사진의 뼈대이자 유럽 최대의 건설현장인 포츠담 플라츠
(광장)도 서서히 제모습을 갖춰가는 중이다.

무려 60만평(200평방km)이 넘는 대지에 최첨단 복합단지가 들어서고 있는
포츠담광장에서 텅빈 황무지에 불과하던 과거의 모습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한쪽에 마련된 안내부스 "인포박스"에서 바라보면 끝이 보이지 않는
규모에 아찔함이 느껴질 정도.

공사장 관계자는 "하루에 트럭 5천대분의 건축자재가 이곳으로 날라져
온다"고 설명한다.

발디딜 틈없이 쌓인 철재들 사이에 수천여 크레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베를린 지도를 처음부터 새로 그려야 하는 이 대공사에 쏟아붓는 공사비만
총 80억마르크(약 4조1천6백88억원).

지난 93년부터 본격 공사에 들어간 포츠담광장은 2000년께 오피스 타운
(50%) 주거지(20%) 호텔 쇼핑몰 등 서비스지역(30%)을 완비한 "도시안의
핵심도시"로 변모하게 된다.

베를린 시청의 아레스 칼란티테스(32)씨는 "벤츠, ABB, 소니 등 세계적인
기업들이 이곳으로 유럽내 헤드쿼터를 옮겨올 예정이어서 이곳이 유럽의
비즈니스 중심으로 부상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호언한다.

지난 92년 이곳에 진출, 성공적으로 정착한 외국기업으로 손꼽히는 삼성
전관 독일법인의 양윤(41)부장도 베를린의 저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베를린은 물가나 임금이 만만치 않은 동네입니다.

하지만 EU역내에서 사업을 벌이려면 현지 진출이 필수적이지요.

이런 점에서 지리적 강점에 질높은 인적자원과 기술력을 겸비한 베를린은
비즈니스 거점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베를린 프로젝트의 또 하나의 갈래는 운송수단의 혁신.

21세기 메가시티에 걸맞는 미래형 교통망을 구축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함부르크와 베를린을 잇는 초고속 열차망, 전 지하철의 무인
운전 시스템, 국제시대를 대비한 신공항 증축 등을 서두르고 있다.

이같은 노력속에 베를린은 착실히 성장의 길을 내달리고 있다.

통일후 급속히 뒤처졌던 1인당 GDP도 94년을 기점으로 독일평균치(4만9백
92마르크)를 따라잡았다.

물론 미래가 마냥 낙관적인 것은 아니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장벽처럼 동.서독인의 마음에는 아직도 뿌리깊은
이질감이 짙게 배어있다.

"옛날이 그립다는 이웃들이 많다"는 동독출신 뵈뵐 피터젠(48)여사의
증언은 베를린이 안고 있는 고민을 그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화합의 정서가 자라나고 있어 멀지않아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는 날이 오리라는게 이곳 베를린 사람들의 공통된
희망사항이다.

< 김혜수 특파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