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행들은 요즘 세계금융기관들사이에 "종이호랑이"로 통한다.

자국내에서 한창 벌어지고 있는 M&A(기업인수합병), 기업들의 구조조정
작업에 외국계 은행들이 깊이 관여하고 있는데도 "뒷짐지고 구경"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독일은행들 입장에서 보면
"안방"을 외국은행들이 차지하고 있으니 망신도 이만저만이 아닌 셈이다.

독일기업들의 구조조정작업은 최근들어 러시를 이루고 있다.

올 상반기중에만도 무려 47건에 달하는 기업간 인수합병이 일어났다.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4배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다임러 벤츠를 비롯해 훽스트 베바 알리안츠 등 내로라하는 기업들의
구조조정작업이 한창 진행중이다.

기업의 운명을 좌우할 이런 일에는 으레 투자은행(investment bank)이
관여하게 마련이다.

일종의 종합금융기관인 인베스트먼트 뱅크는 이런 분야에 노하우가 많은
데다 해당기업이 스스로 처리하기에는 부담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금융기관들사이에 수지맞는 사업으로 통하는 이런 일들을 외국계
은행들이 독일은행들을 제치고 주도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달 초 전격적으로 발표됐던 베린즈방크와 히포방크와의 합병만 봐도
그렇다.

뮌헨에 본거지를 둔 두 은행은 합병을 통해 독일 제3의 거대은행으로
급부상하게 됐다.

은행간 합병인데도 "거간"역할을 한 장본인은 미국의 JP 모건사였다.

모건사뿐만 아니라 골드먼 삭스, 모건 스탠리, 살로먼 브러더스, 레만
브러더스 등 미국계 증권사들이 이런 빅 프로젝트를 거의 주무르다시피 하고
있다.

이에 반해 올 상반기중 독일계 인베스트먼트 뱅크가 주도한 M&A는 10건중
3건에 불과했다.

그것도 독일최대은행인 도이체방크의 자회사인 "도이체 모건 그렌펠"사만이
제 역할을 할뿐이지 나머지 은행들은 외국금융기관과 비교해 경쟁상대가
안되는 입장이다.

독일경제를 주름잡고 있는 독일은행들이 이처럼 처량한 신세에 처하게 된
배경은 간단하다.

전통적인 은행업무에만 안주하다보니 요즘 세계적 흐름인 은행의
"인베스트먼트 뱅크화"에 상대적으로 뒤진 것이다.

M&A 투자자유치 기업의 증권업무자문 등 이율을 많이 남길 수 있는 업무에
대한 노하우가 없는 셈이다.

더 큰 이유는 은행이 산업을 지배하는 독일의 독특한 방식인 "금융산업
체제"(corporate governance)가 발목을 잡고 있어서다.

은행이 기업들의 구조조정작업에 외국계 은행처럼 "거간"역할을 하려고
해도 해당기업들이 난색을 표명한다.

대주주인 은행이 관여하면 객관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 지분관계가 없더라도 주간사역을 경쟁관계에 있는 기업의 대주주인
은행에 맡길 "바보"같은 기업이 있을리 없다.

독일은행들은 최근들어 기업이 갖고 있는 지분을 줄이는 등 "대변신"을
꾀하고 있다.

그러나 금융산업체제에 대한 획기적인 "대수술"이 전제되지 않는한 이러한
시도는 독일은행들이 기대하는만큼 실효를 거둘지는 극히 미지수라는게 금융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 런던=이성구 특파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