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주범들을 길러낸 학교부터 없애버려야 프랑스의
앞길이 열린다"

프랑스 총선(25일)을 앞두고 정.재계지도자 고급관료들을 배출해온 프랑스
엘리트 집산지인 "에나"(ENA:국립행정학교)의 존폐여부가 선거이슈로
등장했다고 외신들이 전한다.

ENA는 자크 시라크 대통령을 비롯 알랭 쥐페 총리와 필립 세겡
국회의장에다 에두아르 발라뒤르 전총리등 야당인 사회당 지도자등을 포함한
정.재계거물들을 배출한 학교.프랑스 엘리트주의의 산실로 불리는
국립대학원이다.

이 학교의 문을 닫으라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는것은 프랑스 엘리트주의
교육이 막을 내릴 때가 됐다는 얘기다.

AFP통신은 "이 학교출신들로 채워진 프랑스 지배구조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불만이 폭발직전"이라고 진단한다.

한때 프랑스의 자존심 희망등으로 칭송됐던 ENA다.

그런 학교가 회생기미를 보이지않는 경제의 위기상황을 초래한 원흉(?)들의
본거지로 전락한 것이다.

르 몽드지는 "나라보다는 집단(ENA졸업생)의 이익에 보탬이 되는 학교라면
더이상 프랑스에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주장에 동조하는 유권자들이 급증하고
있다"고 전한다.

폐지론자들은 ENA출신들이 정.재계와 행정부의 요직마다 포진,
엘리트주의에 젖어 구태의연한 사고의 틀을 깨지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오죽했으면 이 학교 졸업생인 자크 시라크 대통령조차 "ENA출신은
특권층을 형성하고 손에 흙 묻히기를 싫어하며(굳은 일에 몸을 던질수
있는 솔선수범과 희생정신이 없다는 뜻)현실 경제분석과 정책의 추진보다는
아첨에 재능을 갖고있다"고 질타했을 정도.

비판자들은 ENA출신들의 가장 큰 책임은 경제정책의 실패에 있다고
주장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실험적이거나 구시대적인 경제정책사이에서 왔다갔다한
결과 현재 프랑스가 겪고있는 경제위기를 초래했다는 것.

영국병이 노조때문이었다면 프랑스병은 ENA출신의 엘리트주의로 인해
발병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심지어 집권당인 공화국연합(RPR)의 상당수 의원들까지 "60~70년대
ENA출신은 엘리트였지만 글로벌경제와 다양성이 지배하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창조적인 자질과 능력은 하나도 갖추지못한 구시대의 유물들"이라면서
폐교론에 동참하고있다.

이런 여론을 타고 최근 파리에는 "ENA폐교를 위한 모임(OCSENA)"이라는
조직이 발족되기도 했다.

프랑스 유권자들이 총선에 냉담한 것도 여당 야당 가릴 것없이
이 학교출신들이 득실거리는 현실정치에 대한 염증에서 비롯된 것이다.

입후보자들나 당의 리더들이 대부분 ENA출신인 마당에 누가 당선돼도
기대할게 없다는 것이 유권자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어느 당이 집권을 해도 역시 ENA브레인들이 마련한 정책에 따를 것이
뻔하다.

결국 기존의 경제정책을 답습하는꼴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

현재 여야 모두로부터 비판을 받고있는 쥐페 총리의 후임으로 거론되고
있는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프랑스 유권자들의 좌절감을 이해할수 있다.

세겡 국회의장, 발라뒤르 전총리등 하나같이 이 학교 졸업생이다.

이런 판국에 선거라고 해봐야 결국 ENA졸업생중 누구를 뽑느냐는 것밖에
다른 의미가 없다는 냉소적인 분위기가 팽배해있다.

ENA측은 "프랑스가 당면한 경제적인 어려움의 책임을 지우는 속죄양으로
삼지말라"고 반발한다.

하지만 이번 선거가 끝나면 ENA의 존폐와 한걸음 더나아가 프랑스
엘리트주의 교육정책에 상당한 변화가 불가피할 것같다.

< 이동우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