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그침없는 표준화전쟁을 벌이고 있다.

소리없이 전개되는 이 전쟁은 시장지배와 종속의 고리를 확보하기위한
선진기업세력간 싸움이다.

어떤 제품의 규격이나 운영방식 등을 남보다 앞서 정하고 이를 남들이
따라오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경제기득권이다.

최근들어서는 표준화 전쟁의 성격도 바뀌고 있다.

세계적 기업들은 정부나 공공기관의 권위에 의존하는 공식표준
(De Jure Standard)이 아니라 다수 시장참가자들이 인정해주는 사실표준
(De Facto Standard)을 획득하기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사실표준 경쟁에선 승자와 패자가 뚜렷이 구분된다.

승자의 자리는 시간이 갈수록 굳건해지는데 비해 패자가 설 자리는
더욱 초라해지는게 표준 경쟁의원리다.

컴퓨터와 정보통신기술의 위력이 거세지면서 기업경쟁의 원리도
급변하고 있다.

표준을 먼저 선점하지 못하면 영원히 도태된다는 위기의식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표준을 잡기위한 경쟁에서 승패는 누가 먼저 많은 지지자를
끌어들이느냐에 달려있다.

기술수준이 아무리 뛰어나도 시장으로부터 반향이 없으면 표준화는
공염불이 되고 만다.

PC의 자판표준이 형성된 과정을 살펴 보면 이같은 표준화과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현재 PC는 미국의 타자기제조업체인 레밍턴사가 제안한 "QWERTY"라는
방식의 자판배열을 표준으로 삼고 있다.

옛 수동식 영문타자기는 많이 쓰는 알파벳을 중앙에 배열했다.

사용자의 편의와 속도를 고려해서였다.

그런데 이 수동식 타자기는 문자봉이 잉크리본을 두드릴 때 봉들끼리
자주 엉키는 문제가 발생했다.

레밍턴은 이런 엉킴의 문제를 최소화하기위해 현재와 같은 "QWERTY식"
자판을 고안했다.

당시로는 사용자보다 기계의 사정을 더 고려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반발을 살수 있는 고안이었다.

하지만 레밍턴은 타자수양성학교를 자체 운영하는 등 새로운 자판배열을
확산시키는데 총력을 쏟았다.

사용자에게는 비합리적인 자판배열이지만 이 자판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결국 레밍턴의 자판은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이처럼 어떤 새로운 제품이나 기술방식이 시장에서 표준으로 채택되는데는
품질과 기술의 우월이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표준화경쟁의 이같은 법칙은 VTR에서 VHS방식과 베타방식의 대결, 또
PC소프트웨어시장에선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와 애플의 매킨토시운영체제간
싸움의 결과에서 극명하게 입증됐다.

각각 VHS와 윈도의 승리로 끝났지만 전문가들은 아직도 패자인 베타방식과
매킨토시운영체제의 기술적 우위를 인정하고 있다.

두 경우 모두 패자에게는 치명적인 과오가 있었다.

기술적 우위에 자만한 나머지 초기에 배타적인 자세를 취했다는 점이다.

애플은 다른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제조업체들에 비공개원칙을 고집한
결과 PC운영체제시장에서 마이크로소프트에 참패했다.

뒤늦게 비공개원칙을 철회했을 때는 이른바 "전환가격의 법칙"에 따라
윈도 표준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시장에 한 지배적인 표준이 들어서면 이 표준을 바꾸는데 드는 비용은
시간이 갈수록 증가한다는 것이 전환가격의 법칙이다.

표준화 경쟁에서 쓴맛을 보는 기업들은 대부분 유아독존형이자 동시에
과거집착형 경영을 버리지 못한다.

이런 기업들엔 표준화 경쟁 자체 보다도 그후유증이 더 무섭다.

베타방식을 VTR의 표준으로 내세우려다 낭패를 당한 소니는 베타기술
개발에 투입된 돈을 회수 불가능한 "매몰비용(Sunk Cost)"이라고 규정했다.

소니의 경영진들은 대세가 VHS방식으로 기운뒤에도 베타방식의 표준화를
포기하지 못했다.

여기에 투입된 수천억엔의 투자비가 그냥 매몰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소니의 경우처럼 표준화 경쟁에서 패배를 늦게 인정하면 그 늦춰지는
시간에 비례해서 매몰비용도 증가한다.

제품의 시장점유율 경쟁은 한번 패하더라도 이를 만회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표준화경쟁에서는 또다른 기회란 없다.

약진이나 신승 따위의 애매한 승부가름도 없다.

표준화 경쟁에서는 전부를 얻거나 전부를 잃는(all on nothing)
단판승부만 있을 뿐이다.

표준화 경쟁의 이같은 위험부담을 줄이기위해 최근에는 경쟁업체들끼리
시장의 심판을 받기 이전에 사전조정에 나서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 9월 일본의 소니와 도시바진영이 DVD규격 표준화에 합의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DVD규격 표준화에는 소니 도시바 등 직접당사자외에도 미국의
영화제작사에서부터 컴퓨터제조업체에 이르기까지 각 관련분야의 업체들도
한몫씩 거들었다.

이해관계의 범위와 잠재시장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이처럼 관련기업들간
합종연횡과 사전조정으로 표준을 확정하는 사례가 앞으로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그러나 시장의 선택을 배제하고 공급자들간에 미리 표준을 확정할
경우 사실표준으로서의 정통성을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과제로 남는다.

또 표준제정절차가 이런 식으로 바뀔 경우 최종소비자가 표준화를
통해 누리는 혜택은 점차 줄어들게된다.

표준은 원래 새로운 기술의 실용성을 높이기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산업혁명이후 최초의 표준화는 영국의 철도산업에서 이뤄졌다.

당시 영국의 철도회사들은 고대 로마시대의 쌍두전차와 똑같은 폭인
"4피트8인치"를 철로폭의 표준으로 삼아 이를 정부로부터 공식승인
받았다.

이렇게 철로폭의 표준화가 이뤄지고 나서야 비로소 철도가 영국
전역을 잇는 교통수단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이후 전구나 레코드 등의 표준규격이 제정될 때까지만 해도 표준은
새로운 기술의 편의성을 추구하는 과정에 나타나는 부가적 결실일
따름이었다.

그런데 표준의 이같은 속성이 갑자기 바뀌어 기업경쟁의 강력한
수단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이후부터다.

VTR PC 이동통신 등 전자와 정보통신분야가 본격적으로 성장가도를
달리면서부터 전세계에 온통 표준화 전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표준의 개념이 획기적으로바뀌고,이에따라
표준이 기업경쟁의 질서에 혁신을 가져온데는 크게 두가지 원인이 있다.

우선 기술발달의 속도가 급격히 빨라진게 그 첫번째 원인이다.

고든 무어 인텔회장은 "반도체산업은 1년반만에 기술능력을 두배
증가시킬 수 있다"는유명한 "무어의 법칙"을 제창한 바 있다.

이 무어의 법칙은 단지 반도체산업에만 적용되는게 아니다.

하이테크시대를 맞아 모든 분야의 산업이 눈깜짝할사이 새로운 기술을
쏟아내고 있다.

이처럼 수많은 첨단기술들이 해당기업의 이윤창출에 보탬이 되려면
관련분야에서 표준이 되거나 적어도 지배적 표준의 보호막에 들어가야
한다.

기술혁신에 가속이 붙는 만큼 표준화 전쟁이 더욱치열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기술혁신은 심지어 공식표준을 제정하는 정부나 공공기관조차도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신기술의 홍수사태인 셈이다.

표준제정기관이 새로운 기술을 놓고 모여앉아 표준으로 채택하느냐
마느냐를 논의하는 사이 벌써 그 보다 앞선 기술이 등장해 버리는게
현실이다.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네트워크의 발달로 전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묶여진 것도 표준의 개념을 크게 바꿔놓은 요인중 하나다.

이제는 기업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때는 한 국가가 아닌 전세계시장을
염두에 둬야 한다.

또 실제로 새로운 기술에 대해 국가기관으로부터 공식표준을 얻더라도
세계시장에 나가서는 별 쓸모가 없다.

기업 스스로 표준의 국제화에 나서야 하는 것이다.

표준화전쟁의 무대는 세계시장이고 경쟁대상은 전세계 모든 기업들이다.

< 박순빈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8월 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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