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첨단 과학이 농업 생산성을 보장해 주고 있는가"

현대 과학이 농업생산성을 높여왔다는 것이 일반 인식이지만 과학의
발전 이면에는 엄청난 재앙이 숨겨져 있다는 점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농부들이 유전자공학 등의 발전에 힘있어 다수확 품종을 개발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높은 농업생산성을 만끽해온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에겐 이같은 풍요로움이 비싼 대가를 치르게
만들 수 있는 "위험한 곡예"로 비쳐지고 있다.

과학의 발달로 수확량이 엄청나게 늘릴 수 있었는데 반해 병충해
피해에 대한 위험 노출도도 과거 어느때보다 커졌다는 것이 비관론자들의
지적이다.

인류는 한 농토에서 일어난 병충해가 전염병처럼 전 세계의 농작물을
고사시키는 극단적인 시나리오도 가정할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주장이다.

극단적인 시나리오의 논리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과학자들이 개발한 다수확 개량종들은 생물학적 계보상 대부분 한
뿌리라는 것이다.

전문가의 말을 빌리면 개량종들은 대부분 같은 속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여러 개량종들은 "쌍둥이"이기 때문에 병충해에 걸리는
성질도 거의 비슷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한 개량종이 특정 병충해에 걸리면 다른 종들도 같은 병충해에
피해를 볼 가능성이 아주 높은 상황이 도래한다.

작년 여름의 "파이오니아 3394"같은 사태는 이같은 비극적인 시나리오의
가능성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파이오니아 3394"는 미국의 대표적인 종자회사인 파이오니아
하이-브리드 인터내셔널사가 개발한 다수확 옥수수 씨앗이다.

이 종자회사는 이 개량종으로 대 히트를 쳤다.

이 단일 품목이 한해 매출액의 15%를 차지하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기록된 옥수수 씨앗이었다.

또 이후에 나온 옥수수 개량종도 "파이오니아 3394"의 유사종이었다.

전세계 옥수수 재배농가의 절대다수가 "파이오니아 3394"와 그 유사종을
파종한 것으로 여겨도 무방하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파이오니아 3394"와 계열 옥수수 개량종들이 회색반점 잎사귀라고
불리는 병충해에 걸린 것이다.

그것도 미주리 아이오와 일리노이 인디애나주 등으로 광범위하게
회색반점 잎사귀병이 돌았다.

피해 규모가 얼마인지는 아직 추산되지 않았으나 문제가 심각한 것은
사실이다.

이에대해 파이오니아사는 농부들에게 새 옥수수개량종이 회색반점
잎사귀병에 약하다는 사실을 미리 주지시켰다며 자사가 책임질 일은
아니라고 강변했다.

농업전문가들도 지난해 옥수수 흉작의 가장 큰 원인은 이상기후이며
병충해는 부수적인 요인에 불과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번 파이오니아 3394건은 개량종으로 인해 병충해가 전염병
처럼 번져 나갈 수 있는지를 잘 보였준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이외에 미국에서는 최근 감자를 재배하는 농가가 공포에 떨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50년전 아일랜드에서 감자농사를 망쳐 역사적인
기아사태를 빚게 만들었던 감자 병충 균류가 미국에서 발견된 것이다.

미 농업부의 병충해전문가인 존 헬게슨 박사는 현재로써는 살균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며 이 균류에 강한 새 개량종을 개발하려면
지역에 따라 5~15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감자균으로 인해 시장에서 감자가격이 급등하는 등의 부작용은 아직
없다.

그러나 농부들은 감자균 박멸을 위해 예전보다 살충제를 많이 사용해야될
형편이다.

살충제 사용량이 늘어난다는 것은 재배비용이 많아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재배농가의 수익성은 떨어지게 된다.

언젠가는 감자균의 부작용이 나타난다는 지적이다.

이처럼 현대의 농업은 과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불활실성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