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유통업의 소니가 되고 싶습니다"

국제유통그룹 야오한의 와다 가즈오회장이 하는 말이다.

2차세계대전이후 설립된 회사중 전자산업에서는 소니만한 것이 없으므로
야오한은 최소한 중국의 유통분야에서는 소니같은 존재가 되겠다는 얘기다.

중국에 진출한 외국기업과 비교할때 야오한은 이같은 꿈을 실현하기에
충분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미 외국업체로는 중국유통시장에 가장 깊숙이 들어가 있는 야오한은
내년이면 상해에 세계최대규모의 백화점을 개장한다.

대형유통센터도 역시 내년에 완공된다.

2010년까지는 중국내에 1천개의 슈퍼마켓과 3천개의 햄버거체인점을
갖는다는 마스터플랜도 추진하고 있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데는 많은 인.허가규제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야오한은 다른업체에 비해 우대조치를 받고 있으며 이는 야오한이
갖고 있는 중국인맥에 그 비결이 있다.

야오한은 지난 90년 홍콩에 그룹본사를 설립했다.

물론 이전부터도 중국사업에 대해서는 열의를 보였다.

야오한이 천안문사태로 외국기업들이 모두 철수하는 상황에서 반대로
중국에 끝까지 남아 사업확대를 시도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본사를 홍콩으로 옮긴이후 야오한이 중국진출에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하는데는 3명의 협력자가 큰 힘이 됐다.

야오한그룹의 고문인 고임무 신라임씨와 이들의 친구인 관가무씨가 바로
그들이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중국측파트너와의 교섭에서 이들은 완충역을 충실히
소화해냈다.

특히 관가씨가 고문으로 있던 일본총합연구소는 중국사회과학원측과
공동으로 "현대중국경제사전"을 편찬했던 곳으로 관가씨는 편찬작업의
책임자로 중국정부에 굵직한 인맥을 갖고 있었다.

관가씨는 야오한의 와다회장을 처음 만났을 때 "홍콩반환후에도 최소
50년간은 현체제를 유지한다"는 중국정부의 선언만을 믿고 홍콩으로
본사를 옮기기로 한 와다회장의 "순박함"에 놀랐다고 회고한다.

관가씨는 낙관론은 금물이라고 설명하면서도 결국 중국내 지인들을
소개해 주게 된다.

관가씨를 통해 야오한의 인맥은 중국국무원경제사회발전연구센터의 마홍
으로 연결된다.

경제사회발전연구센터는 중국정부직속인 경제정책입안의 싱크탱크에
해당되는 기관이다.

마씨는 당시 센터의 주임으로 정책결정의 열쇄를 쥔 중요인물중 하나였다.

마씨의 도움으로 야오한은 20명이상의 대규모 중국방문단을 보내게 되고
이후 중국에서 야오한의 행보는 급속히 빨라진다.

야오한 일행이 국가원수등 국빈급이 머무는 북경의 조어대에서 숙박했다는
사실에서 얼마나 환대받았는지 알 수 있다.

89년 천안문사태로 외국기업들이 불안을 느끼며 주저할 때 야오한은 홍콩
으로 본사를 옮겼다는 사실이 중국고위인사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낸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도 마씨가 힘이 됐다.

중국방문이 끝나고 관가씨는 야오한과 더이상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다.

그러나 야오한은 관가씨등의 알선으로 신씨를 영입할수 있었다.

50년 중국태생인 신씨는 부친이 유명한 유교연구가 모친이 중국사회과학원
의 국제부장이며 자신도 북경대학원에서 와세다대학에 유학, 경제학을 공부
한 엘리트였다.

신을 통해서는 신화사홍콩사장인 주남, 중국신기술창업투자공사(CVIC)
부사장인 진위력등을 소개받았다.

진은 중국공산당보수파의 거두인 진운의 딸이었다.

야오한이 중국국제신탁투자공사(CITIC), CVIC에 출자하고 북경 상해에서
쇼핑센터등을 개발하는데는 신의 힘이 작용한 것이다.

신은 야오한과의 고문계약을 마치고 최근 멀어져갔다.

와다회장은 그동안 다리역을 해줬던 사람들이 멀어졌지만 이미 앞으로의
사업을 전개하는데는 충분할 정도로 "중국파이프"가 확보됐다고 말한다.

"일단은 북경 상해를 중심으로 예정대로 중국사업을 확대할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경제만이 아니라 문화에서도 중국에 공헌할 수 있는 일을
펼쳐 나가겠다"

와다회장과 야오한의 중국사업은 확실히 2막에 접어들었다.

< 박재림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