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경영자의 자리는 언제나 외롭다. 하루하루가 외줄타기곡예의 연속
이다. 이익을 바라는 주식투자자의 시선은 잠자리에서조차 엄청난 무게로
다가온다. 시시각각 내려야할 결정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그의 몫이다.
아무리 보잘것 없는 기업이라도 그럭저럭 시간을 때우는 경영자는 있을
수 없다. 적자기업을 이끌어가야하는 위치라면 더욱 그렇다.

미 가전업체인 제니스전자의 제리 펄만 회장겸 최고경영자(CEO)도
예외는 아니다. 펄만회장은 제니스호의 키를 잡은 이래 지난 10여년의
시간을 폭풍우속에서 시달려야 했다. 최근에는 지난 5년간 3억3천2백만
달러에 달하는 누적적자에 대해 거세게 항의하는 주식투자자를 달래는
일이 무엇보다 큰부담이었다. 펄만의 시대는 끝났다는 식으로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은 견딜수 없는 모욕이었다.

펄만은 결국 제니스호에서 하선할수밖에 없을까. 지난 89년이래 급격히
기울고 있는 제니스호를 복원시키지 못하고 IBM GM 웨스팅하우스의 전
최고경영자들과 마찬가지로 불명예퇴진할수 밖에 없을까.

그러나 당장은 그렇지 않다는게 일반적인 시각. 이사진들이 그를 밀고
있기때문이다. HD(고선명)TV개발에 대한 그의 구상을 이사진들이 그와
함께 완료시킬것을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이회사 경영위원회 킴볼 브루크너의 말대로 그는 아직 1급 최고경영자
로서의 자질을 잃지 않고 있다.
펄만회장이 결정적으로 궁지에 몰린 것은 지난 92년말. 제니스의 주력
사업인 TV부문이 현저히 기울면서부터였다. 브라운관과 케이블장비부문의
적자가 눈덩이처럼 늘었던것.

89년에 20억달러를 밑돌던 적자가 90년 91년에는 각각 50억달러선으로
불었고 급기야 92년에는 1백20억달러에 육박하기에 이르면서 경영위원회가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동안 활동이 미미했던 재정위원회도 적자를
줄이기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펄만회장도 자신의 결정사항에
대한 이들의 참여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어려운 시기에 기업을
살리기 위한 광맥을 찾기 위해서는 여러사람의 지혜를 모아야한다"는게
그의 지론이었다.

직원들의 보너스를 영업실적에 연동해 지급한다는등의 회생책이
잇달아 터져나왔다. 판매현황에서 유동자산에 이르는 20여개의 항목들에
대한 철저한 검토가 이루어졌다. 지난해에는 2천5백만달러규모의 증자
계획도 발표했다. 3천4백50만달러에 이르는 악성부채도 이자율이 싼
자금으로 대체했다. 멕시코 현지 TV조립공장도 축소했다. 막대한 자금
투입이 요구되는 고해상도 브라운관과 컴퓨터모니터 개발사업에서는
일단 후퇴했다. 불황타개를 위한 전략적 후퇴이다. 이로인해 올해
5천만달러정도의 비용을 절감할수 있는 등 회생으로 기초를 다질수 있게
됐다는 자체분석이다.

주주들도 점차 제니스의 재기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있다. 지난해
제니스의 주식일부를 사들인 크랩 휴슨그룹은 제니스가 미니크라이슬러가
될수있다고 볼정도로 상황이 호전되고 있다. 경영위원회와 함께 펄만
회장에 대한 주주들의 신뢰도가 회복되고 있다.

펄만회장은 그러나 아직 조심스럽다. "넘어야할 산이 너무 많다. 소니
마쓰시타 필립스 톰슨 등 거인들이 버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견 자신감도 비친다. "신기술개발에 가용할수 있는 자원은
총동원한다는 계획이다. 아무도 돈을 벌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야를
개척, 경쟁자의 의표를 찌른다는 구상"이라고 밝힌다. 최신모델
개발, 경쟁력있는 가격정책으로 대중수요를 파고든다는 제니스의
저돌성을 주목해달라는 주문이다. 대규모 살빼기작업을 마친 멕시코
공장의 몸놀림이 가벼워졌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발효로 인한
관세철폐, 그리고 미국TV시장의 수요강세로 올해 2천4백만달러의 영업
이익이 예상된다고 강조한다.

향후 케이블TV와 퍼스널컴퓨터를 연계한 HDTV분야등 미개척분야에 대한
연구활동에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펼쳐 업계의 선두에 서겠다는 다짐이다.
향후 2년간 미개척분야에 투자할 자금은 이미 마련해뒀다고 주장한다.

"HDTV와 디지털기술개발로 승부를 걸 생각이다. 그러나 이기술 개발이
완료될때까지 가만히 앉아있지는 않겠다. 컬러TV와 가전제품을 팔아 돈을
벌어들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행동개시해야 할 때이다" 흑백TV와
같이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질수만은 없다는 펄만회장의 새로운 각오
이다.

<김재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