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웨이벌리GC에서 열린 US주니어아마추어챔피언십 결승전. 17살 동갑내기 두 명이 세계 아마추어 최강자를 가리는 매치플레이를 치르고 있었다. 한 명이 타이거 우즈(미국), 또 다른 한 명이 라이언 아머(미국)였다. 우즈는 3년 연속 이 대회 챔피언에 도전하는 당시 최강. 아머도 만만치 않았다. 14번 홀까지 둘은 평행선을 달렸다. 아머가 먼저 강펀치를 날렸다. 15번 홀과 16번 홀을 거푸 따내면서 승부가 아머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한 홀이라도 비기기만 해도 챔피언은 그의 몫이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우즈는 달랐다. 17번, 18번 홀에서 잇따라 버디를 잡아내며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렸고, 연장전에서도 아머를 밀어내고 3년 연속 우승 대기록을 세웠다. ‘우즈의 역사’에 아머가 조연으로 남게 된 순간이었다.
세계 골프계 반란 일으킨 '뜨거운 40대'
◆18년 만에 손에 쥔 감격의 트로피

우즈를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던 청년 아머는 이후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가 존재감을 다시 드러낸 건 24년이 흐른 29일(현지시간)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샌더슨 팜스 챔피언십(총상금 430만달러)에서였다. 이 대회를 합계 19언더파로 제패하며 생애 첫 승을 신고한 것이다. 1999년 프로 데뷔 이후 소규모 지역 대회와 웹닷컴 등 2부 투어를 오가며 18년간 105번의 대회 출전 끝에 들어올린 첫 우승 트로피였다. 그는 지난 시즌 페덱스컵 순위 159위에 그쳐 PGA 투어 시드를 잃었다. 결국 시드전 격인 웹닷컴 투어 파이널전을 치러 11위로 다시 투어 카드를 손에 쥐었다. 그는 “시드를 잃는 건 직장을 잃는 거나 마찬가지여서 골프를 포기할까 생각할 정도로 절박했다. 스스로를 믿도록 끝까지 응원해준 아내에게 감사하다”며 울먹였다. 그는 첫 우승 상금 77만4000달러(약 8억7000만원)를 받았다.

◆펄펄 끓는 40대 챔프들 “우리도 있다”

올해 만 41세인 아머는 최근 주가를 올리고 있는 ‘뜨거운 40대’ 그룹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같은 날 한국 투어(KPGA)에선 베테랑 황인춘(43)이 차세대 주자 강성훈(30)을 꺾고 현대해상 최경주인비테이셔널을 제패했다. 박세리(40)와 동갑내기인 크리스티 커(미국)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사임다비 말레이시아에서 다니엘 강(미국), 박성현(24·KEB하나은행) 등의 추격을 뿌리치고 통산 20승을 달성했다.

‘40대 챔프’의 등장은 이제 드문 일이 아니다. 20~30대가 점령한 PGA 투어만 해도 지난 시즌부터 현재까지 로드 팸플링(48), 팻 페레즈(41), D A 포인츠(48), 제이슨 더프너(40), 헨릭 스텐손(41) 등이 6승을 올렸다. 아머와 같은 1976년생인 김성용도 지난 4월 KPGA 카이도시리즈전남오픈에서 투어 데뷔 11년 만에 첫 승을 따냈다. 일본에선 44세의 가타야마 신고가 지난달 일본프로골프(JGTO)투어 매치플레이 최고령 우승 기록을 새로 썼다.

◆낀 세대에서 ‘해피 포티’로

40대는 프로골프 세계에서 ‘낀 세대’로 통했다. 20~30대 후배에겐 파워와 비거리에서 밀리고, 50대에게만 자격을 주는 시니어 투어에는 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노련한 쇼트 게임과 정교한 퍼팅으로 자신들의 영역과 가치를 찾아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동안 ‘한계’로 여겨져온 체력도 ‘과학적 관리 시스템’의 도움 등으로 지속 가능한 골프 체질로 변모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지난 5월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에서 통산 3승을 올린 베테랑 강수연(41)의 말이다. “골프만 알고, 골프만 생각하는 삶은 금방 지치기 쉬워요. 여러 선배의 조로(早老)를 목격하면서 많은 후배가 취미를 찾는 등 오래 즐길 수 있는 골프로 돌아서고 있다는 게 중요한 변화라고 봅니다.”

부상이 적고 효율이 높은 스윙을 추구하는 점도 같은 맥락이다. 조도현 프로(44)는 “관절을 많이 쓰고 상·하체 분리가 큰 스윙보다 몸통 전체를 이용해 부상을 줄이는 ‘이지 스윙’을 선호하는 게 요즘 트렌드”라고 말했다. 하지만 비거리 중심의 파워골프가 대세로 굳어지는 요즘 추세에서 여전히 ‘40대 챔프’가 넘어야 할 장벽이 높다는 지적도 나온다. 스포츠 의학자인 설준희 연세대 의대 명예교수(연세 골프 사이언스 센터장)는 “쇼트게임의 정확도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비거리를 기본으로 낼 수 있어야 세계 무대에서 우승할 기회를 지속적으로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