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 4월26일 오후 3시25분

300가구 이상 아파트는 공인회계사의 감사를 받도록 한 ‘아파트 외부감사제도’가 시행 4년째를 맞았지만 현장 곳곳에서 파열음이 일고 있다. 내밀한 아파트 살림살이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아파트관리소와 결산 오류를 지적하는 회계사 간 실랑이가 이어지고, 감사보수를 둘러싼 잡음도 끊이지 않고 있다.
[마켓인사이트] 폭행에 블랙리스트까지… 아파트 회계감사 '복마전'
폭행사건으로 번진 아파트 회계감사

26일 회계업계에 따르면 인천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감사를 벌이던 여성 회계사 A씨(38)와 관리사무소 직원 간 폭행 사건이 벌어졌다. A씨는 아파트 관리소에 ‘감사 자료가 부족하고 재무제표 수치가 잘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다가 관리소 여직원 B씨(47)로부터 반말과 폭언을 들었다. 화가 난 A씨가 B씨의 어깨를 밀치자 B씨는 A씨의 뺨을 때렸고 관리소장이 가세하면서 폭행사건으로 번졌다. 이 사건은 경찰 조사를 거쳐 법정 다툼으로 비화됐다.

관리사무소는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A씨가 소속된 감사반 책임자에게 “이 사건을 문제 삼으면 전국 아파트 관리소장들이 공유하는 ‘블랙리스트(요주의 명단)’에 올리겠다”고 협박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최근 법원 조정으로 양측이 합의해 사건이 종결됐지만 A씨는 “다시는 아파트 감사를 맡지 않겠다”며 감사반을 떠났다.

지난 2월 경남 양산에 있는 한 아파트에선 회계사가 감사 결과 재무제표에 문제가 있다며 감사의견을 ‘한정’으로 통보하자 관리사무소가 감사보고서 접수 자체를 거부했다.

관리사무소는 ‘적정’ 의견을 주겠다는 회계사를 찾아내 감사를 마무리한 것으로 전해졌다. 감사대금도 받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계약해지를 당한 기존 회계사는 공인회계사회에 이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행위가 감사방해죄에 해당하는지 검토해달라고 요청했다.

관리사무소와 회계사 간 ‘갑을관계’

인천 아파트 폭행사건이 회계업계에 알려지면서 아파트 감사 시장에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는 전언이다. 아파트 관리소장들이 소속돼 있는 공동주택위탁관리회사를 중심으로 아파트 감사 시장에 참여하는 회계사 명단과 성향이 공유되고 있다는 것이다.

관리소장 또는 관리소 직원을 아파트에 파견하는 공동주택위탁관리회사는 500여 개에 달한다. 이 중 10여 곳은 아파트 단지 500개가량을 관리하는 대형 위탁관리회사다.

회계업계 관계자는 “아파트 감사인은 입주자대표회의에서 결정되지만 사실상 관리소장이 추천하는 감사인이 선임되는 경우가 많다”며 “아파트를 감사하는 회계사에게 관리소장은 ‘갑’이고 위탁관리회사는 ‘슈퍼갑’으로 통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한번 찍히면 블랙리스트에 올라 소문이 금방 퍼지기 때문에 일감을 따기 힘들어진다”고 했다.

아파트 관리소 측과 회계사 간 ‘갑을관계’가 고착된 데는 회계사들의 무리한 영업행위도 한몫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한 회계사는 헐값에 홀로 수백 곳의 아파트 감사 일감을 따낸 뒤 부실감사를 한 사실이 적발돼 공인회계사 등록이 취소됐다.

한 회계사는 “법을 시행할 때 정부는 300가구 아파트 기준으로 연 300만원 정도의 감사보수를 예상했지만 최근 입찰에선 80만원까지 가격이 떨어졌다”고 했다.

국토교통부는 관리비 비리 척결을 위해 2015년부터 300가구 이상 공동주택은 매년 10월31일까지 외부 회계감사를 받도록 했다. 외부감사를 받지 않으면 아파트 관리주체(관리사무소)에 1000만원 이하 과태료가 부과된다. 이 법은 아파트 난방비 관련 비리를 폭로해 사회적으로 주목받은 배우 김부선 씨의 이름을 따 ‘김부선법’으로 불리기도 한다. 전국의 외부감사 대상 아파트 단지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9847개에 달한다.

하수정 기자 agatha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