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증권 매각을 위한 공개입찰이 지난 25일 마감됐는데도 현대그룹은 아직 우선협상대상자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 사진은 서울 여의도 현대증권 본사 앞.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현대증권 매각을 위한 공개입찰이 지난 25일 마감됐는데도 현대그룹은 아직 우선협상대상자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 사진은 서울 여의도 현대증권 본사 앞.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현대증권 매각 가격은 최소 1조원을 웃돌 겁니다.”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이 지난 23일 현대증권 인수 의지를 접은 뒤 회사 경영진과의 식사 자리에서 현대증권 예상 매각가격을 언급했을 때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고 한다. 시장에서 예상하는 가격보다 크게 높았기 때문이다. 당시 현대상선 채권단은 장부가(6800억원) 이상만 받아도 ‘대성공’이라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29일 현대그룹이 인수 후보자들의 입찰 가격을 개봉한 결과는 박 회장이 예견한 그대로였다. 한국투자금융지주와 KB금융지주 등 유력 인수 후보들이 써낸 인수가는 1조원을 넘었다. 밤늦게 사무실에서 상황을 전해 들은 윤종규 KB금융 회장과 김남구 한국투자금융 부회장도 놀랐다는 전언이다. 1조원대면 경쟁사를 무난하게 따돌릴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현대그룹, 현대증권 매각 우선협상대상자 발표 또 연기…도대체 왜?
1조원대 가격은 본입찰 직전 시가 3580억원보다 3배가량 높은 수준이다. 회계상 순자산가격의 1.5배가량이다. 한 외국계 증권회사 대표는 “한국 금융회사는 금융당국 규제 이슈 등으로 주가순자산비율(PBR) 1배 이상 가격을 받기 어렵다는 것이 인수합병(M&A)의 정설인데, 놀랍다”고 말했다. 지난달 미래에셋그룹에 팔린 KDB대우증권 매각가격(2조3205억원)은 PBR 1.28배, 2014년 매각된 우리투자증권(현 NH투자증권)은 0.71배 수준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현대증권 매각 흥행을 바라보는 현대그룹 임직원의 속내는 편치 않다. 연간 3000억원 안팎의 순이익을 내는 알짜 계열사를 제3자에게 팔아야 해서다. 더구나 매각 대금은 전액 현대상선으로 흘러간다. 현대상선은 곧 채권단이 경영하는 회사가 된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현대증권 매각 절차가 본입찰 이후 갑자기 지연되는 이유도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현대그룹은 지난 25일 본입찰 뒤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시기를 두 차례 미뤘다. 다음달 1일 발표한다는 계획이지만 인수 후보자들은 일정이 또다시 미뤄질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현대그룹은 “인수 가격과 조건이 엇비슷해 공정한 심사에 시간이 걸린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인수 후보자들은 해명을 그대로 믿지 않는 눈치다. 인수 후보 측 한 관계자는 “현대증권 몸값이 치솟자 현대그룹이 다른 욕심을 내는 것 같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고 걱정했다. KB금융과 한국투자금융은 매각 대금을 내지 못하거나 금융당국이 승인을 거부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 인수 가격만 간단히 비교하면 곧바로 결론이 나온다는 것이다.

투자은행(IB)업계는 현대그룹이 경매호가식 입찰(프로그레시브 딜)로 인수 가격을 끌어올리려 할 것이라는 관측도 내놓고 있다. 입찰 가격에 비춰볼 때 KB금융과 한국투자금융의 인수 의지가 예상외로 강력하다는 사실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현대그룹이 채권단과 매각 주관사들을 배제하고 독자 매각 결정을 내린다는 방침을 세운 것도 이 같은 관측에 힘을 싣고 있다.

현대증권 매각 흥행은 현대상선 구조조정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현대상선이 해운업 불황을 버틸 수 있는 현금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당초 채권단이 예상한 매각 대금은 4600억원 수준. 현대증권 지분 담보 대출금 3610억원을 갚고 난 뒤 1000억원가량을 운용자금으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매각가가 1조원을 넘어서면 6000억원 이상의 현금을 확보할 수 있다. 채권단의 출자전환 규모가 줄어들면 현대그룹이 현대상선의 경영권을 유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채권단 관계자는 “밀린 용선료와 운항설비 사용료 등을 감안하면 수천억원의 현금이 들어와도 순식간에 소진될 수 있다”고 말했다. 채권단은 오히려 현대증권 매각 흥행으로 개인(비협약) 회사채 투자자들의 채무 재조정이 차질을 빚을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현대증권 매각 대금을 회사채 상환에 우선 사용하라는 요구가 나올 수 있어서다.

좌동욱 기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