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점점 드러나는 '엔저 도박 정책'의 5대 함정
엔저(低)로 상징되는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경제정책)는 2012년 12월 시작됐다. 초기에는 엔·달러 환율이 달러당 140엔을 훌쩍 넘어설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지만 최근 116엔대로 주저앉았다. 올 들어 닛케이지수 하락폭도 10%에 달한다. 지금으로선 성장률과 물가상승률의 목표치 도달이 요원하다. 아베노믹스 실패론이 확산되는 배경이다.

추진 초기부터 아베노믹스엔 ‘5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 지적됐다. 첫째, 로빈슨 크루소, 즉 ‘국수주의 함정(Robinson’s ultranationalism trap)’이다. 아베식의 인위적 엔저에 대해 두 가지 시각이 엇갈려왔다. 하나는 일본 경제가 당면하고 있는 디플레이션을 타개하는 자구책으로 인식해 엔저를 묵인하는 시각이다. 미국 등이 이 부류에 속했다.

[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점점 드러나는 '엔저 도박 정책'의 5대 함정
다른 하나는 근린궁핍화 차원으로 인식해 반발하면서 환율전쟁에 가담하는 시각이다. 엔저에 따른 유로화 강세 피해가 심한 유럽국가와 신흥국이 이 부류에 속했다. 특히 마지막까지 버티던 중국이 작년 8월 이후 이쪽에 가담하면서 환율전쟁이 점입가경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둘째, ‘J-커브 함정(J-curve trap)’이다. 엔저로 무역수지를 개선하고 경기를 부양하려면 ‘마셜-러너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국제무역이론에서 하나의 고전으로 다뤄지고 있는 이 조건은 외화표시 수출수요의 가격탄력성과 자국통화표시 수입수요의 가격탄력성을 합한 값이 ‘1’을 넘어야 엔저가 무역수지를 개선시킬 수 있음을 뜻한다.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할 때는 무역수지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 특히 엔저에 따른 수출입 가격 변화에도 물량 변화가 쉽지 않은 초기에는 무역수지가 심하게 악화된다. 엔저가 지속되는 상황에서도 무역적자폭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음에 따라 J-커브 함정에 빠졌다는 비판이 나온 지는 오래됐다.

셋째, ‘부메랑 함정(boomerang trap)’이다. 갈수록 나라 안팎에서 반대가 심해지는데도 아베 정부가 엔저를 무리하게 유도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디플레이션 타개다. 엔저가 되면 수출이 늘어남과 동시에 물가를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다. 엔저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수출업종을 중심으로 주가가 반등하는 것도 이 기대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경제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수출 증대보다 내수 확대가 더 중요하다. 인구구조 고령화 등으로 내수가 쉽게 회복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 이 상황에서 무리한 엔저로 남아 있는 내수 기반마저 붕괴하면 일본 경제는 침체국면으로 되돌아가는 자충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넷째, 일본 내 ‘자금이탈 함정(exodus trap)’이다. 아베노믹스 초기 일본 내 자금은 더 풍부해졌다. 엔저를 유도하기 위해 풀리는 유동성에다 ‘체리 피킹’ 차원에서 주가 상승을 겨냥한 외국자금이 유입됐기 때문이다. 체리 피킹이란 주가가 떨어질수록 체리가 무르익어 따 먹으면(주식 매입) 맛있게 먹을 수 있다(투자 수익)는 것에 비유해 생긴 용어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 상황이다. ‘S자형 투자원칙’이나 ‘하이먼-민스크의 리스크이론’대로 초기 단계를 지나 일본 경제 회복과 같은 추가 투자유인을 제공하지 못하면 어느 날 갑자기 자금이 이탈한다. 올 들어 엔캐리 자금이 빠져나가는 것이 그 증거다. 이 상황이 지속되면 ‘역자산 효과’까지 겹쳐 ‘부메랑 함정’에 빠져든다.

다섯째, ‘좀비 함정(zombie trap)’이다. 아베 정부의 엔저 정책처럼 특정국 경제에서 최후의 보루로 여기는 기대가 무너지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정책당국이 어떤 신호를 보낸다 해도 국민이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 좀비현상이다. 좀비는 죽은 시체와 같다는 의미다.

좀비 현상이 심해지면 비이성적인 행동이 나타난다. 경제에서 비이성적인 행동은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내가 하면 옳고, 남이 하면 잘못됐다고 보는 이분법적 사고다. 이분법 경제는 일본처럼 위기론이 거론될 만큼 장기간 침체 국면이 지속되는 경제상황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적(敵)이다.

일본 경제는 베리 아이켄그린 미국 UC버클리 교수가 주장한 ‘안전통화 저주’에 걸려 있다. 국제금융시장이 혼란에 빠지면 엔화는 안전통화로 재인식된다. 성장률을 끌어올리지 못한 상황에서 엔화 가치가 강세로 전환하면 일본 경제는 더 어려운 국면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결국 아베 정부가 이제 드러나는 5대 함정에서 탈피하기 위해 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지금보다 엔저를 더 끌어올리는 무리수를 두거나, 경쟁국과의 공존을 모색하고 다른 정책으로 보완하는 길이다. 무리하게 전자의 길을 택한다면 아베 총리는 머지않은 미래에 조기 하야할 운명에 처할지도 모른다.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