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 6월19일 오후 3시58분

국내 한 대형 자산운용사는 올해 초 페트로차이나 등 우량 중국 회사채를 담은 중국채권펀드를 출시했다. 우량 기초상품이 많은 만큼 투자자에게 고지하는 위험등급을 3~4등급으로 부여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중국 채권은 위험등급을 높여야 한다”는 금융감독원의 지침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중국 당국이 부여하는 높은 신용등급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운용사는 ‘울며 겨자 먹기’로 최고 위험등급인 1등급으로 펀드 등록을 마쳤다. 이 펀드의 판매 실적은 기대치를 훨씬 밑돌았다.
[자본시장 '10년 역주행'] 법에 없는 '그림자 규제' 2000건…창구지도가 더 무섭다
○곳곳에 금감원 그림자

금감원은 투자자 보호가 중요한 문제였겠지만 위험도는 자산운용사가 먼저 측량하고 판단해야 할 사안이다. 하지만 국내 운용사가 출시하는 모든 공모펀드는 사실상 금감원의 재가를 받아야 구조를 최종 확정할 수 있다. 법적 근거는 없지만 펀드를 등록해야 하는 ‘을(乙)’의 입장에서 금감원의 의견은 반드시 지켜야 할 ‘명령’이나 다름없다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금융당국이 지난해 7월 자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같이 숨어 있는 규제는 2000건에 달한다. 법령에 근거해 관리하는 명시규제의 두 배 수준이다. 헤지펀드 모범규준, 자산운용사 고유재산투자 가이드라인 등 모범규준·행정지도·협회내규·구두지도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금융상품을 출시할 때 사전에 적격 여부를 심사하거나 당국 실무자 재량으로 심사 요건을 추가해 펀드 등록 등을 지연시키는 관행 등이 ‘비판의 도마’에 오르고 있다.

증권사가 주가연계증권(ELS)의 투자자 청약을 받을 때 증권신고서의 투자자 청약 시기를 결정하는 문제도 여전히 안갯속이다. 애초 금감원은 신고서 접수 이후에 상품 내용을 수정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최소한 신고서 접수 다음날부터 청약받도록 지도해왔다. 문서화되지 않은 구두지도였다.

하지만 이 같은 강제 규제가 불필요하다고 판단해 올해부터 청약 여부를 증권사 자율로 결정하도록 변경했다. 그럼에도 옛 기준을 강요하는 ‘창구지도’는 바뀌지 않고 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규제를 자율화한 이후에도 금감원은 여전히 접수 당일 청약하지 않도록 구두지도를 하고 있다”며 “‘위반을 해도 제재하지 않겠다’고 얘기하지만 등록과 조사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금감원의 말을 듣지 않을 재간이 없다”고 말했다.

○방치되는 시장발전 방안

법령규제의 그늘도 여전히 깊게 드리워져 있다. 고객예탁금을 일률적으로 증권금융에만 예치하도록 규정한 것을 포함해 레버리지(차입)비율 산정 방식, 고객에게 담보로 받은 주식을 증권회사가 주식대차거래에 활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 등 증권사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증권사와 저축은행 간 연계 영업, 투자 경험이 있는 고객에 대한 설명의무 차등 적용 등 영업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요구도 빗발치고 있다.

또 고객예탁금 규정의 경우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독점구조 때문에 증권사가 예치기관을 자유롭게 선택해 운용 전략을 다변화하고 금리를 합리화할 수 있는 길을 막는다는 비판이다.

천창민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구두지도 등 비명시적 규제는 실무자에 따라 규제 내용과 강도가 달라지는 등 예측 가능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자본시장 발전을 가로막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며 “당국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행정지도는 반드시 문서화·공식화해 규제를 투명하게 운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유정 기자 y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