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피난처 거점으로 증시 '쥐락펴락'…검은머리, 넌 누구냐
지난해 4월12일 오후 2시께, 특정 시기(만기일) 주가지수를 미리 정해 놓고 팔거나 살 권리를 거래하는 지수옵션시장. 50억원 선에서 큰 변화가 없던 5월물 콜270의 개인 순매수 규모가 갑자기 130억원 가까이로 늘었다. 이 시각 기관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거래 결과는 묘하게도 개인 128억원 순매수, 외국인 127억원 순매도. 전날 총선 결과에 관심이 쏠려 있던 때, 선물옵션시장에서 개인과 외국인 간 대량 손바꿈이 일어난 듯한 결과가 나온 것은 이례적이었다.

주식시장에 비해 36배 가까운 레버리지(지렛대 효과)가 발생해 고위험·고수익 시장으로 불리는 선물옵션시장에서는 2008년께부터 자전거래로 의심받을 만할 정도로 짧은 시간에 외국인과 개인 간 대량 네이키드 매매(단방향 일일 거래)가 이뤄지곤 했다. 외국인으로 가장한 한국인 작전세력, 즉 ‘검은머리 외국인’이 지수 방향성을 틀어서 거액의 차익을 챙긴 것 아니냐는 일반 투자자들의 푸념도 터져 나왔다.

검찰의 CJ그룹 비자금 조성 의혹 수사에서 홍콩 등 해외 계좌를 이용한 국내 주가 조종 혐의가 불거지고, 조세피난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사람들의 이름이 공개되면서 검은머리 외국인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검은머리 외국인이 처음 주목받은 것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0년대 말이다. 당시 코스닥시장 등의 중소형주에 투자해 주가를 끌어올려 일반 투자자들을 모은 뒤 시세차익을 챙기고 빠지는 ‘먹튀 수법’으로 악명을 떨쳤다. 요즘은 이상 거래 감시가 현물시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슨하면서도 차익을 더 크게 얻을 수 있는 선물시장으로 주무대를 옮긴 것으로 전해진다.

증권가에서는 거액 자산가들이 단순한 시세 조종보다는 세금을 피하고 은밀하게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검은머리 외국인으로 위장하는 사례가 늘어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영권 분쟁이 벌어질 때, 대주주 지분을 승계할 때도 검은머리의 유혹에 빠져든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검은머리 외국인의 활동에 대한 관심은 커졌지만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면면은 어떤지 밝히기가 쉽지 않다. 주가조작으로 의심이 가는 일부 사례에 남긴 ‘흔적’으로 그 존재를 감지할 뿐이다.

300억원대 투자금을 운용하는 업력 15년의 한 ‘슈퍼 개미’는 “외국인이 관심을 가질 이유가 거의 없는 종목에 외국계 창구로 매수세가 몰리거나 외국계 창구가 특정 매물을 순식간에 확 거둬갈 때 검은머리 외국인이란 의심을 한다”면서도 “좁다면 좁다고 할 수 있는 작전의 바닥에서 그동안 검은머리 외국인 관련자를 접해보지 못했을 정도로 조직 관리가 철저한 것 같다”고 혀를 내둘렀다.

김동욱/조진형/안재광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