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한 '검은머리 외국인'…코스피 막판 방향 바꾸고 '파생시장서 年 1조 수익' 소문도
‘주요 출몰 지역=선물옵션시장. 자주 등장한 시기=2008~2011년. 정체=여전히 모호. 증시 개입 수법=대담한 형태로 진화. ’

‘검은머리 외국인’으로 불리는, 외국인으로 가장한 한국인 투자자들의 특징이다.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활동한 ‘원조’ 검은머리 외국인은 ‘잡주’로 통하던 중소형주를 외국계 증권사를 통해 매수해 주가를 단기에 끌어올린 뒤 시세차익을 ‘먹고 튀는’ 단순한 행태를 보였다.

이에 비해 요즘 활동하는 검은머리 외국인은 감독당국의 감시를 피해 진화한 행태로 증시를 교란하고 있다. 검은머리 외국인이 ‘준동’하는 날엔 글로벌 증시와 다른 방향으로 코스피지수가 움직이기도 한다. 이들이 챙기는 시세차익이 연간 1조원에 육박한다는 얘기도 있다.

◆활동 20년…여전히 모호한 정체

대담한 '검은머리 외국인'…코스피 막판 방향 바꾸고 '파생시장서 年 1조 수익' 소문도
검찰의 CJ그룹 조사와 조세 피난처 한국인 투자자 명단 공개 등을 통해 증권가에서 소문으로만 떠돌던 ‘검은머리 외국인’의 존재가 수면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검은머리 외국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그들이 다루는 자금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어떻게 돈이 흐르는지는 여전히 안갯속과 같다.

검은머리 외국인의 규모를 가늠하는 기준으로는 조세피난처를 통한 외국인 투자 규모가 우선 꼽힌다. 은밀히 해외로 빼돌린 돈을 추적을 피해 국내에 재투자하려면 조세피난처를 통하는 것이 검은머리 외국인으로선 ‘합리적 선택’이기 때문이다. 증권가에선 조세피난처를 통해 들어오는 자금 상당수가 검은머리 외국인이 주인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집계한 지난 4월 말 현재 외국인투자자 증권매매 동향에 따르면 국내 증시에 투자하는 외국인 투자자는 3만6331명이다. 국적별로는 미국이 1만2163명으로 가장 많고 일본이 3444명으로 뒤를 잇는다. 3위는 조세피난처로 알려진 케이맨제도로, 2796명이 등록돼 있다. 미국은 사실상 조세피난처인 델라웨어주에 대부분이 등록돼 있다.

조세피난처 투자자들의 투자 규모도 만만찮다. 올해 5월 현재 룩셈부르크 국적 투자자는 44조2130억원, 싱가포르 국적 투자자는 23조2260억원을 국내에 투자했다. 케이맨제도 투자자 보유분은 총 7조8480억원에 이른다. 스위스 국적 투자자는 10조2870억원을 투자했고, 70만~100만원이면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할 수 있다는 홍콩에서의 투자액은 8조9720억원이다.

증권가에선 전체 외국인 자금의 20%가량을 조세회피지역 자금으로 보고 있다. 특히 스위스, 룩셈부르크 등 전통적 조세피난국가와 건지, 바하마, 버뮤다, 큐라소, 버진아일랜드 등 조세피난처를 거쳐 유럽계 자금 상당 부분이 들어온다.

◆대기업 ‘파킹’ 수요에 연 1조원 차익설도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1997년 외환위기 전후로 대기업들의 경우 해외로 자금을 대량으로 옮기는 ‘파킹’ 수요가 많았다. 골드만삭스, 메릴린치 등의 글로벌 금융회사부터 율리우스베르 같은 프라이빗뱅킹 전문회사들이 일부 대기업 오너 집안을 상대로 알음알음 파킹 대행 영업을 시도했다는 소문도 있다. 이때 일부 대형 검은머리 외국인이 생겼을 것으로 증시 관계자들은 추정한다.

프라이빗뱅킹 회사들이 통합계좌로 주식을 산 다음 서브 계좌로 나눠 해당 주식을 보유한 실소유주가 누군지 알 수 없도록 하거나 해외 금융사 상품계정을 통해 대출과 비슷한 풋옵션 계약을 맺어 차명주식을 늘렸다는 얘기다.

대기업들에 이 같은 수요가 있었을 것이란 추측에는 경영권 확보와 세금 문제가 이유로 거론된다. 즉 △기업분할이나 지주사 전환 △증여·상속 △비자금 조성 과정에서 검은머리 외국인이 만들어지고 동원됐다는 설명이다.

우선 경영권 분쟁 문제가 있는 기업들은 우량 계열사 자금을 일부 빼 차명으로 지분을 늘리는 방안을 고민했을 수 있다. 지주사 전환 등 기업 분할을 할 경우에도 검은머리 외국인이 오너를 돕기 위해 공매도나 매도 등 가상 공격을 해 주가를 조작하고, 대주주 지분 가치를 높이는 데 동원될 수 있다. 대주주가 증여할 땐 주가를 억눌러 증여세를 줄이기 위해 검은머리 외국인을 동원할 개연성도 없지 않다는 게 증권가의 관측이다.

여기에 대주주 지분을 팔 때 양도세뿐 아니라 증여세, 상속세 등을 한꺼번에 고민해야 하는 복잡한 세금체계를 피하기 위해 해외 파킹 수요가 발생했다는 시각도 있다. 외환위기 당시에는 대표이사가 연대보증을 서 개인재산을 다 날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해외로 자금을 돌리고자 하는 요구도 있었다.

실제 일부 대기업이 2000년대 초 역외펀드를 활용해 대주주 경영권 방어를 시도했다가 구설수에 오르거나 사법처리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사모펀드(PEF)들이 세금 부담을 줄이기 위해 금융감독원에 등록하지 않고 홍콩, 싱가포르 등 해외에 법인을 등록해 놓고 한국에서 수익을 챙겨가는 사례도 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대기업형 검은머리 외국인의 행태는 2008년 이후 선물옵션시장에 등장한 ‘검은머리 외국인’의 행동을 설명하진 못한다. 개인 ‘모찌계좌(차명계좌)’와 검은머리 외국인 간에 200억~300억원급 대규모 거래를 한 달에 3~4번씩 반복하고 종가 동시호가를 통해 지수 방향성을 틀어놓는 일은 적발의 위험이 큰 대담한 시도라는 평이다. 일각에선 2009년 이후 3년간 검은머리 외국인이 동원한 작전세력이 선물옵션시장에서 연간 7000억~1조원의 이익을 챙겼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세계 증시가 급락을 거듭하던 2008년 10월28일 한국 증시에선 코스피200지수선물이 -4.14~9.12% 요동치며 사이드카가 발동되고 코스피지수가 2.42% 상승했다. 예상 밖의 시장 변동으로 ‘파생시장 개인투자자 대학살’을 이끈 주체가 검은머리 외국인이란 소문이 있었다.

◆규제 사각지대

검은머리 외국인의 증시 교란 폐혜는 크지만 감독당국은 제재는커녕 실태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현행법상으로 검은머리 외국인 여부를 파악하는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투자신고서에 나오는 국적만 갖고 진짜 외국인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며 “국내 자금은 금융실명법에 따라 은행, 증권사에 자료를 요구해 자금을 추적할 수 있지만 해외 계좌는 상대국에 자료를 요청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자본시장연구원 관계자는 “검은머리 외국인에 대해선 기초자료도 없고 관련 연구를 시작도 못 해본 상태”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탈세 등을 통해 일단 해외로 자금이 빠져나가면 검은머리 외국인 여부를 판별할 수 없는 만큼 불법자금 조성과 유출 단계에서 예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동욱/조진형/안재광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