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당 100엔' 시대가 4년여 만에 다시 열리며 수출기업의 영업이익 악화가 점차 가시화하고 있다.

특히 엔저(円低·엔화가치 약세) 장기화는 경영난에 시달리는 일부 업종을 부실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결정타가 될 것이란 경고가 나온다.

상황이 지속하면 경상수지 역시 악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한국의 수출실적이 나빠지면 경제성장률도 떨어질 수 있다.

문제는 현재 당국이 취할 수 있는 뾰족한 수가 없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민간이 환율변동에 자생적인 대응능력을 기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 IB 14곳 중 12곳 "엔저 1년 이상 간다"
14일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5월 초 현재 외국계 투자은행(IB) 14곳 중 12곳이 달러 당 100엔이 넘는 상태가 1년 이상 계속될 것으로 봤다.

엔저가 장기화한다는 '시장 컨센서스'가 사실상 이뤄진 것이다.

환율 변동에는 경제주체들의 심리가 크게 반영된다.

이 때문에 시장 컨센서스가 형성되면 실제 환율의 움직임 역시 이를 따라갈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1년 뒤에 엔·달러 환율이 100엔을 넘어갈 것으로 보는 IB는 조사대상 중 단 한 곳도 없었다.

그러나 1월초 한 곳이 등장하더니 2월 중순엔 또 한 곳이 늘었다.

3월 말 4곳, 4월 말 9곳으로 뛴 데 이어 이달 13일 현재 12곳으로 사실상 모든 IB들이 같은 전망을 내놨다.

엔화가치를 가장 낮게 예상한 곳은 크레디트스위스다.

크레디트스위스는 12개월 후 달러 당 120엔을 예상했다.

이는 지난해 9월13일의 77.12엔에 견줘 55.6%나 오른 것이다.

이상원 국제금융센터 연구원은 "IB의 환율 전망은 정책을 발표하는 시점, 적용하는 시점, 영향을 확인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변화한다"며 "현재는 이 3단계 중 (아베노믹스의) 영향을 확인하는 시점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구조조정 업종, 엔저에 부실회복 발목 잡히나
엔저가 장기화하면 일본과 경쟁도가 높은 국내 기업의 수출은 타격이 불가피하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다른 조건이 같을 때 원·엔 환율이 10% 하락하면 한국의 수출은 연 4.1% 줄어든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조선, 해운 등 현재 몸살을 앓는 업종들이다.

기업부실을 빨리 털어내려면 빠른 경영실적 반등이 필요한데 엔저 현상이 이를 발목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금융경영연구소에 따르면 올해 연평균 엔·달러 환율이 달러 당 100엔, 원·달러 환율은 1,100원이 됐을 때 조선업종의 영업이익은 1조8천억원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한 발짝 더 나아가 달러 당 110엔, 1,000원이 되면 영업이익 감소폭은 5조2천억원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이렇게 되면 구조조정에서 회복하려는 이들 업종의 노력은 한층 더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

연구소는 달러 당 연평균 100엔, 1,100원이 될 때 자동차 업종에서 2조9천억원, 기계·전기전자에서 6조6천억원씩 영업이익이 감소할 것으로 봤다.

달러 당 110엔, 1,000원 상황에서는 감소폭이 8조3천억원, 18조9천억원으로 늘었다.

전체 제조업의 이익감소 규모는 26조원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주 원 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조선업은 일본이 아닌 중국과 경쟁하고 해운업 역시 엔저 영향보다는 수출경기 영향을 더 크게 받는 경향이 있다"며 "엔저 장기화가 기업 구조조정과는 크게 상관이 없을 수 있다"고 말했다.

◇ 경상수지 악화→경제성장률 저하 가능성도
국내 경제성장률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에 달한다.

수출이 줄어들며 경상수지가 나빠지면 한국의 성장률 역시 떨어질 공산이 크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엔화 환율이 달러 당 100엔, 원화는 달러 당 1,000원이 됐을 때 총 수출이 2.0%포인트 줄어들며 경상수지가 125억달러 급감한다고 봤다.

이는 지난해 경상흑자 431억달러의 4분의 1을 넘는 규모다.

이에 따라 경제성장률 역시 1.8%포인트 하락하는 것으로 추정됐다.

신창목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엔저는 현실화하고 있지만, 원고는 가정보단 나은 상황"이라며 "실제 경상수지·성장률 감소폭은 더 낮을 확률이 크다"고 말했다.

반면에 한국금융연구원은 올해 경상수지가 지난해보다 소폭 줄어든 383억달러가 될 것으로 봤다.

이는 연평균 원·달러 환율이 달러 당 1,093원, 연말 엔·달러 환율이 달러 당 105엔 수준이라고 가정한 결과다.

금융연구원 박성욱 거시국제금융실장은 "엔화약세 영향이 일부 품목에 나타나겠지만, 반도체 단가회복, 하반기 세계 수요 확대로 수출은 완만한 증가세를 나타낼 것"이라고 내다봤다.

노무라 역시 지난 달 말 보고서에서 국제원자재 가격 하락세를 고려해 한국의 경상수지 흑자폭이 500억달러가 될 것이란 전망을 내놨다.

◇ 엔저 장기화에도 당국은 근본적 방법 없어
문제는 엔저 현상이 장기화해도 대응할 뾰족한 수가 없다는 점이다.

엔화가치의 잣대인 엔·달러 환율은 미국과 일본 간의 시장이라 애초에 우리 당국이 손을 댈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국으로선 일본계 등 외국자본이 국내에 급격히 들어오거나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조치하는 게 손에 쥔 유일한 카드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엔·달러 환율보다는 원·엔 환율을 안정시키는 것이 수출기업 입장에서는 더 중요하다"며 "원화를 약세로 유도해 원저·엔저 현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당국의 직접개입은 쉽지 않다는 의견도 많다.

국제적으로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은 자칫 '환율조작'이라는 누명을 쓸 수도 있어서다.

기준금리 인하 역시 하나의 방법으로 꼽힌다.

주 연구위원은 "원화가 기축통화가 아니라 금리를 무작정 내릴 수 없다는 지적도 있지만, 선진국의 유동성 공세에 심하게 밀리지 않을 정도로는 추가 금리 인하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엔저 장기화의 근본적인 대책은 결국 민간의 환율 자생력을 키우는 데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 연구위원은 "(당국이 취할 근본적인 방안이 없는 이상) 기업으로선 환율변동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개발하고 틈새 수출시장을 공략하는 등 노력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전했다.

(서울연합뉴스) 홍정규 방현덕 기자 zheng@yna.co.krbanghd@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