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과 현대중공업이 우선주 발행 한도 확대를 놓고 맞붙은 현대상선 주주총회는 현대그룹의 판정승으로 막을 내렸다. 현대상선은 22일 서울 연지동 현대그룹빌딩에서 정기 주총을 열어 우선주 발행 한도를 2000만주에서 6000만주로 늘리는 내용 등을 담은 정관 변경안을 표 대결 끝에 원안대로 통과시켰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현대상선은 2000억~3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통해 신규 자금을 조달하고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경영권 위협에서 한발 더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2대 주주인 현대중공업 측이 현대그룹 경영진에 대한 불신을 직설적으로 드러내 또 다른 갈등이 불거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재계의 관측이다.

◆현대그룹 ‘판정승’

“위임장을 보여달라니까요.”(현대삼호중공업 대리인) “책임자가 내려오면 바로 조치할 테니 기다리세요.”(현대상선 관계자)

이날 주총은 오전 9시 시작해 낮 12시에 끝날 만큼 3시간 동안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정관 변경안은 우선주 발행 한도를 2000만주에서 6000만주로 확대하고, 이사회 결의에 따라 쉽게 증자를 할 수 있게 한 것이 핵심이었다. 전체 지분의 82.69%에 해당하는 주주가 참석해 찬성 67.35%, 기권·반대·무효 32.65%로 통과됐다.

계열사인 현대삼호중공업과 함께 22%가량의 지분을 가진 현대중공업은 전날 “기존 주주의 재산권을 과도하게 침해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발표하고 주총에서 반대표를 던졌으나 정관 변경을 막지 못했다. 범현대가의 현대건설(7.2%)과 현대산업개발(1.3%)이 불참한 게 영향을 미쳤다.

현대중공업 측은 주총이 끝난 뒤에도 “700만여표에 대한 위임장이 없다”며 확인을 요구해 오후 늦게야 실질적인 주총이 끝났다. 현대그룹은 주총 뒤 성명을 내고 “이번 표결은 현대중공업이 아직 현대상선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M&A) 의지를 버리지 않고 있다는 증거”라며 “현대중공업은 이른 시일 내에 보유하고 있는 현대상선 지분 일부를 현대그룹에 넘겨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대중공업, 현 경영진 ‘불신’

현대중공업 측은 현 회장 등 경영진의 능력에 문제를 제기했다. 첫 안건인 이사 보수 한도에 대해 현대삼호중공업 대리인은 “현대상선이 지난해 1조원가량의 순손실을 낸 상황에서 이사 보수 한도 100억원은 너무 많다”며 “경쟁사인 한진해운은 한도 60억원 중 지난해 3분기까지 36억원만 집행했다”고 주장했다.

표결에서 원안대로 통과되긴 했지만 2대 주주가 이사 보수 한도를 문제삼은 것은 이례적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현 경영진에 대한 불신이 있는 게 사실”이라고 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12주기 기일 다음날인 지난 21일 저녁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이 대주주인 현대중공업이 ‘정관 변경 반대’를 선전 포고한 배경을 놓고도 여러 관측이 엇갈린다.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10월 현대상선이 실시한 2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에 불참하면서 경영권에 관심이 없다는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범현대가의 ‘묵인’ 아래 현대중공업이 견제구를 던져본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경영권 분쟁 불씨 잠복

현대그룹과 범현대가의 경영권 분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현 회장의 남편인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2003년 8월 갑자기 세상을 뜬 직후 KCC는 현대그룹 인수를 추진할 것임을 공식 선언하기도 했다. 현대중공업과 현대삼호중공업은 2006년 4월 현대그룹에 알리지 않고 골라LNG로부터 현대상선 지분 18.4%와 8.25%를 각각 사들였다. 현대중공업은 또 2011년 3월 우선주 발행 한도를 2000만주에서 3000만주로 늘리려는 현대상선의 정관 변경안을 부결시켰다.

올해 주총 표 대결에서 진 현대중공업 측은 “주주로서 주총에서 정당한 목소리를 낸 것일 뿐”이라며 당장 추가적인 행동에 나설 계획은 없다고 했다. 재계 관계자는 “범현대가의 장자격인 현대차그룹이 계열사 현대건설을 현대상선 주총에 불참시킨 점을 눈여겨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욱진/김대훈 기자 ventu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