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 3월12일 오전 8시38분


상장사 지분 5% 이상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슈퍼개미’로 불리는 큰손 개인투자자들. 하지만 슈퍼개미라도 모두 다 똑같은 슈퍼개미는 아니다. 이들은 투자 성향에 따라 ‘인내파’와 ‘행동파’로 나뉜다. 인내파는 저평가된 기업 주식을 ‘단순투자’ 목적으로 사놓고 오를 때까지 기다린다. 이에 비해 행동파는 ‘경영참여’를 선언하며 주가를 끌어올릴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경영진에 요구한다. ‘배당을 늘리라’ ‘무상증자를 실시하라’는 등 주주이익 환원을 요구하거나 투명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감사 교체를 추진하는 식이다.

어느 유형이 옳다 그르다고 속단하기는 힘들다. 문제가 되는 것은 적대적 인수·합병(M&A) 등을 들먹이며 주가를 끌어올린 뒤 차익을 실현하고 나가는 슈퍼개미들이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에 나오는 베짱이처럼 노력하지 않고 돈을 벌려 한다고 해서 시장에서는 이들을 ‘슈퍼베짱이’로 부르기도 한다.

◆주가 오르면 지분 팔고 떠나기도

슈퍼베짱이들에겐 정형화된 투자 공식이 있다. 일단 공격 목표를 정한 뒤 5% 이상 지분을 사들인다. 지분 보유 목적은 ‘경영참여’로 공시한다. 언론 등이 ‘OO기업에 슈퍼개미 등장’이라고 보도하면, 슈퍼베짱이는 적대적 M&A를 선포하고 지분 확대에 나선다. 회사 경영에 문제가 있다며 각종 소송을 제기하며 경영진을 압박한다. 다른 소액주주들에게 동참을 호소하며 우호지분도 확보한다. 이 과정을 통해 주가가 치솟으면 단숨에 지분을 팔고 떠난다. 주가는 폭락하고, 그 손실은 뒤늦게 추종 매수한 일반 개미들에게 돌아간다.

증권가에선 최근 가구업체 팀스를 공략했던 김성수 씨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김씨는 지난해 5월 팀스 지분 5.88%를 경영참여 목적으로 매입했다고 신고했다. 주가가 1만원을 밑돌던 때였다. 이후 한 달가량 지분을 추가로 매입한 뒤 적대적 M&A를 선포하면서 세력을 규합했다.

주주총회 소집허가 등 각종 소송을 제기하며 경영진을 압박하는 수순이 이어졌다. 김씨는 경영권 분쟁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이 기간 중 지분 변동 내역과 의결권 규합 상황, 소송 진행 과정 등을 담은 ‘주식 등의 대량 보유 상황 보고서’를 32건이나 쏟아냈다. 그러나 주총 표대결을 앞두고 적대적 M&A 기대로 주가가 2만원대로 오르자 돌연 보유지분 10%를 장내에서 팔아치웠다. 8개월 만에 그가 번 돈은 2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슈퍼베짱이의 원조는 2004년 서울식품공업에 대한 적대적 M&A를 시도하다 100억원 가까운 차익을 남기고 떠난 경대현·경규철 부자”라며 “이후 이들을 모방한 사례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회 관계자는 “슈퍼베짱이가 적대적 M&A를 선언하면서 동시에 보유 지분을 털어내는 것이 전형적인 수법”이라며 “차명계좌 등으로 지분을 더 사놓은 뒤 경영권 분쟁을 고조시키면서 파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대주주 지분 낮은 기업 주로 공략

일반 슈퍼개미들은 저평가된 우량주를 선호하지만 슈퍼베짱이들은 △대주주 지분율이 낮고 △시가총액이 작으면서 △지배구조 및 경영진 등에 약점이 있는 기업을 타깃으로 삼는다.

지난 10년간 슈퍼개미와 경영권 분쟁에 휘말린 7개 상장사의 분쟁 당시 최대주주 지분율은 평균 15.41%에 불과했다. 2008년 김태훈 씨가 적대적 M&A를 선언했을 때 평안물산의 최대주주 지분율은 12.27%였다. 윤철완 씨가 경영권을 노렸던 사이노젠의 최대주주 지분율은 10.21%에 불과했다.

‘공격’ 시점은 악재가 터진 직후다. 팀스는 ‘중소기업 위장’ 논란에 휘말리며 조달청이란 최대 공급처를 잃은 직후에 김성수 씨의 타깃이 됐다.

증시 전문가들은 팀스처럼 시가총액 300억원 미만에 최대주주 지분율이 20%에 못 미치는 상장기업들은 슈퍼베짱이들의 공격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한다.

증권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이런 기준에 부합하는 상장기업은 54개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 중 위다스(4.52%) 삼영홀딩스(5.11%) 피에스엠씨(7.46%) 파루(8.17%) 등은 최대주주 지분율이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증시 전문가들은 이익잉여금이나 유형자산 규모가 큰 기업도 슈퍼베짱이들의 먹잇감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법적 하자 없어 문제삼기 어려워

슈퍼베짱이는 증시에 상당한 후유증을 낳고 있다. 한 애널리스트는 “추종 매수한 소액주주들이 큰 손해를 보고 공격당한 상장사도 망가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평안물산 사이노젠 남한제지 등은 슈퍼베짱이들의 공격을 받으며 주가가 한때 급등했지만 결국 상장폐지됐다. M&A업계 관계자는 “과거에 시세를 조종했던 사람들이 슈퍼베짱이들과 손잡고 부당거래에 나서는 사례도 적지 않다”며 “일부는 한계기업 오너들과 짜고 해당 기업을 거짓으로 M&A하는 척하며 주가를 띄운 뒤 차익을 나눠먹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슈퍼베짱이들의 수법은 날로 진화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막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적대적 M&A를 시도하는 시늉만 하다 지분을 다 팔아도 “M&A가 여의치 않아 접었다”고 주장하면 법적으로 문제될 게 없어서다. 수많은 소액투자자들을 현혹시키는 ‘경영참여’ 공시는 아무런 제약 없이 언제든 ‘단순투자’로 바꿀 수 있다. 실제 M&A를 시도하다가 여의치 않아 포기했을 수도 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상장사 대주주가 지분을 장내에서 팔아도 문제 삼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슈퍼베짱이는 공시를 내면서 지분을 사들이기 때문에 문제 삼기 어렵다”고 말했다.

심은지/조진형 기자 summ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