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용사 지분 많은 기업, M&A 방어 '비상'
금융투자협회의 '자산운용사 의결권 행사 가이드라인' 초안은 기업이 주총에서 기존 경영진의 경영권 강화와 적대적 기업 인수 · 합병(M&A)을 막기 위한 제도를 도입할 경우 자산운용사에 '반대' 의결권을 행사할 것을 권하고 있다.

한국거래소와 금융투자협회 등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자산운용사들이 지분의 5% 이상을 대량 보유하고 있는 상장종목 수는 247개 사에 달한다. 운용사들이 당국 지침에 따라 의결권을 행사할 경우 기업들의 M&A 방어 등에 비상이 걸릴 전망이다.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 유도

개정안은 자산운용사들이 기업의 집중투표제 배제와 시차임기제 도입을 주총 안건으로 올리면 '반대'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특정 후보에게 표를 몰아줄 수 있는 집중투표제를 배제함으로써 대주주 의결권을 강화하려는 기업들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기 위한 것이다. 또 이사 임기만료 시기를 엇갈리게 해 한꺼번에 이사진이 교체되는 것을 막기 위한 시차임기제 도입에도 '반대' 의결권 행사를 유도하고 있다.

경영권 방어의 수단인 초다수결의제와 황금낙하산제 도입에도 '반대'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초다수결의제는 이사 선임 · 해임 요건을 강화해 적대적 M&A를 시도하려는 인사들의 이사회 진입을 막으려는 조치다. 황금낙하산제는 적대적 M&A로 물러나는 임원에게 거액의 퇴직금을 지급하도록 해 M&A 비용 부담을 높이는 방안이다.

반면 소액주주들이 이사 후보를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이사후보추천제를 기업이 도입하려 할 경우에는 자산운용사들이 '찬성'할 것을 권고하는 쪽으로 바뀐다.

◆'지나친 운용 간섭' 논란

이번 개정은 2008년 2월 자산운용사 의결권 행사 가이드라인이 처음으로 만들어진 후 3년여 만이다. 현재는 자산운용사가 사안별로 수익자 이익에 부합하도록 안건을 검토해 찬성과 반대를 정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개정안에서는 찬성 안건과 반대 안건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이번 개정안을 담은 금투협 가이드라인은 올해 안에 확정돼 내년 초 주총부터는 이에 근거한 의결권이 행사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자산운용사의 지분율이 높은 기업은 관련 정관 변경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이번 개정은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강화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며 "주총에서 기관투자가들이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하도록 하기 위한 취지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구체화한 가이드라인이 기존 수익자 우선 원칙에 부합한 내용이어서 큰 반발 없이 개정안이 마련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지나친 규제라고 지적했다. 한 운용사 주식운용본부장은 "회사별 상황이 제각각인 상황에서 일률적으로 지침을 내리는 것은 문제"라며 "외국은 의결권 자문 서비스의 자문을 바탕으로 운용사가 최종 결정을 내리게 한다"고 설명했다.

다른 운용사 사장은 "금융투자업계에 대한 감독당국 규제가 심화되는 추세"라며 "이럴 경우에는 사고 이럴 때는 팔라는 자산운용 지침까지 나올 판"이라고 지적했다.

서정환 기자 ceose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