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스트 증권의 SK㈜ 지분매집으로 촉발된 SK그룹의 경영권 위기가 진정국면에 접어들면서 향후 SK그룹의 행로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영국계 투자펀드인 소버린 자산운용의 100% 자회사로 알려진 크레스트는 SK그룹의 지주회사격인 SK㈜의 지분 14.99%를 매수, 최대주주로 부상하면서 SK그룹의 양대축인 SK㈜와 SK텔레콤의 경영권을 뒤흔들 수 있는 지위를 확보했다. 그러나 모나코 몬테카를로에 소재한 영국계 투자회사로만 알려진 소버린과 크레스트의 실체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있어 이들의 실체와 의도가 향후 SK그룹의 경영권 향방을 가늠하는 핵심요소라는 분석이다. ◆SK그룹 경영권 어떻게 될까 = 대주주이던 최태원 SK㈜ 회장이 구속되고 보유주식 전량을 SK글로벌 채권단에 담보로 내놓으면서 재계 서열 3위인 SK그룹의 경영권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에 빠져있다. 전문경영인인 손길승 그룹회장과 최 회장의 친인척들이 있긴 하나 계열사 지분을 거의 가진 것이 없어 실질적인 경영권을 갖고 있다고 보긴 어려운 실정이다. 이런 와중에서 크레스트는 SK㈜ 주식 1천902만8천주를 확보함으로써 SK C&C 등 SK그룹 계열사들을 제치고 단숨에 SK㈜의 최대주주로 떠올랐다. 소버린과의 대화창구였던 SK㈜ 유정준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아직 소버린측으로부터 이사회 참여 요구는 없었다"고 말했으나 소버린은 보도자료를 통해 "사업계획 재조정과 현실적이고 즉각적인 기업지배구조 개혁계획을 위해 경영진과 건설적으로 작업할 것을 희망한다"고 밝혀 경영참여 방침을 기정사실화했다. 크레스트는 또 SK㈜가 과거 수익성 없는 방만한 투자로 인해 저평가된 기업이라며 이를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시사해 SK글로벌 채권단이 요구하는 주력 계열사의 SK글로벌 지원은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만약 주력 계열사의 지원없이는 회생이 어렵다고 판단한 채권단이 SK글로벌을 법정관리나 청산으로 끌고 갈 경우 채권단에 보유주식 전량을 담보로 제공한 최 회장은 SK그룹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잃게 된다. 세종증권 유영국 연구원은 "적대적 인수합병(M&A) 여부를 떠나 14.99%의 지분이면 이미 SK㈜의 실질적 지배권이 크레스트로 넘어갔다고 볼 수 있다"면서 "SK글로벌의 회생은 더욱 가능성이 낮아졌으며 최 회장도 경영권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정준 CFO는 "소버린을 장기투자자로 파악하고 있으며 설혹 적대적 M&A를 시도한다 하더라도 충분한 경영권 방어대책이 마련돼 있다"고 자신감을 표시해 시장의 시각과는 다소 동떨어진 상황인식을 보였다. 때문에 시장에서는 '크레스트의 정체와 의도에 대해 뭔가 알려진 것 외에 SK㈜만 알고 있는 특별한 것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크레스트 정체-SK 대응 `미스터리' = SK㈜와 SK텔레콤의 경영권 위기를 경고하는 시장의 다급한 목소리와는 달리 SK㈜와 SK그룹 구조조정본부는 "경영권 방어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사뭇 태평스런 분위기다. 유정준 CFO도 구체적인 방법은 밝히지 않으면서도 "SK㈜와 SK텔레콤의 경영권위기는 상당부분 과장된 측면이 있으며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한 충분한 대책이 마련돼 있다"고 자신있게 말해 상황인식에 있어 괴리를 보였다. 이 때문에 시장에서는 'SK가 뭔가 믿는 게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흘러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SK㈜의 최대주주로 올라선 크레스트의 실체가 논란의 핵심이다. 아직까지 크레스트에 대해서는 모나코 몬테카를로에 소재한 영국계 투자회사인 소버린 자산운용의 100% 자회사라는 것 외에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유 CFO는 "소버린측 인사를 한 번 만났는데 자기 회사가 가족 몇명으로 구성됐으며 한국, 러시아, 체코 등의 저평가된 주식을 사들여 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수익창출을 꾀하는 장기투자자라고 소개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소버린이 '수익창출'과 '경영능력 부재'를 빌미로 못미더운 현 경영진을 몰아내고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경영진을 앉히고자 한다면 그 자체가 이미 적대적 M&A나 다름없는 행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증시에서는 소버린의 자회사라고 알려진 크레스트가 SK의 해외출자법인 또는 '백기사'일 가능성까지 조심스럽게 대두되고 있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소버린은 과거 국민은행 등에도 투자한 사례가 있다하더라도 크레스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진 것이 없다"면서 "크레스트의 실질적인 전주가 누구인지가 이번 사건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만약 크레스트가 SK에 우호적인 세력이라면 SK가 그토록 자신만만한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SK㈜ 경영구도 바뀔까 = 크레스트증권의 `공격'으로 적대적 M&A설에 휘말렸던 SK㈜는 현재 황두열 대표이사 부회장을 정점으로 유정준 경영지원부문장과 정만원에너지.마케팅사업부문장 등이 경영을 주도해 나가고 있다. 특히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회계학 석사 출신으로 다국적 컨설팅 회사인 매킨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유정준 전무는 소버린과의 대화채널을 독점하다시피 하면서 SK㈜ 경영구도의 핵으로 떠올랐다. 최 회장과 김창근 사장 등이 구속된 지금 황 부회장이 최고경영자(CEO)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긴 하지만 업무의 비중으로 볼 때 유 전무쪽으로 상당부분 무게중심이 옮겨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유 전무는 "소버린이 아직 이사회 참여를 요구한 적은 없지만 만약 이사선임이나 사외이사 파견 등을 요구해올 경우 법률과 정관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고 말해 소버린이 대주주로서 일정한 경여참여 가능성을 시사했다. 즉, 아직까진 SK글로벌 지원이나 지배구조개선과 같은 민감한 사안에 대한 경영간섭은 없었지만 향후 주요한 사안에 대해 경영참여 내지는 감시가 본격화될 가능성을 시사한 셈이다. 일각에서는 SK글로벌이 정상화에 실패하고 최 회장이 경영권을 상실하게 되면 소버린과 유 전무 등이 중심이 된 새로운 이사진이 구성되리란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SK㈜ 관계자는 "크레스트측이 아직까지 최고이사결정 기구인 이사회에 참여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경영에 적극 개입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사내외 이사로 선임되면 당연히 경영에 참여하게 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한편 공정거래위원회는 "SK그룹의 SK㈜지분은 31.88%이나 이중 실제 의결권행사가 가능한 지분은 13.47%"라며 "여기에 우호지분인 우리사주조합(4.4%)을 감안하면 SK측의 총지분은 17.87%로 크레스트의 14.99%보다 높아 경영권방어에 문제가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서울=연합뉴스) 정 열기자 passion@yonhap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