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닉스 이사회가 정부.채권단의 매각방침에 정면으로 반기(反旗)를 들어 파문이 일고 있다. 종업원과 주주, 채권단의 이익에 반하는 매각결정은 수용할 수 없다는 명분 하에 양해각서(MOU) 동의안 통과를 거부한 것이다. 부실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채권단의 결정사항에 이사회가 `비토'를 놓은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다. 이로써 지난 넉달여간 정부의 `강력한 후원' 아래 추진돼온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와의 매각협상은 사실상 수포로 돌아가 국내 금융권은 물론 경제계 전반과 세계 반도체 시장에 예측불허의 파장을 몰고올 전망이다. ◆ 배경 = 이사회가 채권단이 어렵사리 통과시킨 매각안을 거부한 명분은 의외로 단순하다. 마이크론으로의 매각이 주주와 종업원, 채권단 등 모든 이해 당사자의 이익에 부합하는 `대안'이 아니라는 판단에 따른 것.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채권단이 잔존법인의 재건방안으로 제시한 재무구조개선안이 지나치게 미흡한 점. 이사회는 먼저 매각대금으로 받을 마이크론의 주식이 최근 주가와는 달리 과다하게 산정돼 있는 점을 꼽았다. 박종섭 사장도 이미 지난주말 채권단에 보낸 공문에서 지난 26일 마이크론의 종가 26달러와 비교할 때 채권단이 이번 MOU 체결로 약 9억8천만달러 이상의 매각대금을 과다 추정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여기에 우발채무 발생규모와 시기를 비현실적으로 추정하고 있는 점도 문제라고 보고 있다. 양해각서는 조세.환경.지적재산권 등의 우발채무에 대해 거의 무한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어 대표적 `불합리 조항'으로 지적돼왔다. 또 채권단이 잔존법인의 매출과 현금흐름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고 부채탕감규모를 낮춘 점도 잔존법인의 생존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이사회는 판단했다. 7천∼1조원 규모의 매출규모를 가진 잔존법인이 부채 3조원을 짊어지고서 생존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 하이닉스측은 부채의 91%를 탕감, 사실상 '부채 0(Debt Free)'을 만들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계속 피력해 왔다. 이사회가 지목한 `문제조항'은 협상 상대방인 마이크론도 최근 하이닉스와 채권단측에 통보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주주와 종업원이익을 대변하는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로서는 잔존법인의 생존방안이 결여된 매각안을 통과시키는 것 자체가 회사에 해를 끼치는 행위라고 판단한 셈이다. 이사회의 매각안 승인거부를 시장에서는 사상초유의 사태로 받아들이고 있는 분위기다. 이는 기본적으로 하이닉스 이사회가 미국 인텔식으로 사외이사 비중이 70%에 달하는 독립적 이사회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또 '개미군단'으로 대변되는 소액주주들의 강한 반발도 이사회의 거부결정에 힘을 실어준 것으로 보인다. ◆ 파장 = 이사회 승인 거부로 하이닉스-마이크론간 매각협상은 사실상 결렬된 것으로 시장은 받아들이고 있다. 양해각서가 효력발생의 전제조건으로 이날 오후 6시까지 채권단과 하이닉스, 마이크론 3자(者)가 ▲MOU 동의안과 ▲재무구조개선안을 일괄처리토록 규정하고 있어 협상이 사실상 `마침표'를 찍은 것으로 봐야한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하이닉스 고위관계자는 "이 정도의 상황이면 협상은 끝난 것으로 봐야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그간 한국경제의 최대 불안요인으로 지목돼온 하이닉스 처리문제가 다시금 원점으로 되돌아온 셈이어서 일각에서는 시장과 경제전반에 또 다시 불확실성을 증폭시킬 것이란 우려도 제기하고 있다. 특히 대우자동차.현대투신 처리와 함께 국내 기업.금융 구조조정의 결정판으로 인식돼 왔다는 점에서 대외신인도에 부정적 여파가 미칠 것이라는 시각도 정부를 중심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D램값 강세로 호황을 기대하던 반도체시장에도 긍정적 영향을 받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시장의 최대 구조조정인 이번 빅딜이 무산됨으로써 D램 경기가 다시 곤두박질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에따라 각 D램 메이커들 사이에서는 또다시 `너죽고 나살기'식의 출혈경쟁도 재연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 전망 = 매각협상이 무산된 이후의 하이닉스 진로는 한마디로 예측불허다. 일단 현재로서는 하이닉스측의 `희망'대로 독자생존 쪽으로 방향을 잡을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인다. 이미 협상결렬에 대비, 각종 준비작업을 벌여온 하이닉스는 우선 독자생존 프로그램을 가동할 방침이다. 하이닉스는 지난주 채권단에 제출한 `독자생존 보고서'에서 채권단이 2조원의 부채만 탕감해주거나 출자전환해주면 충분히 생존할 수 있다는입장이다. 또 ▲2003년까지 비메모리 사업분리를 통한 전략적 제휴와 투자유치로 2억∼5억달러를 유치하고 ▲비핵심.비영업 자산매각 등으로 1조2천억원의 자구노력을 이행하고 ▲2005년까지 12인치 팹(Fab) 신규투자 조정으로 1조5천억원의 투자를 감축하는 등의 자체 자구계획도 제시했다. 하이닉스는肩린?하면 3월말 현재 본사기준 124%인 차입금 비율이 63%로 떨어지고 2조3천억원의 현금흐름 개선효과를 거둘 것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런 `청사진'에 대한 채권단과 업계의 시각은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못하다. 가장 큰 문제는 채권단의 지원없는 `순수한 의미'의 독자생존이 과연 가능한지의 여부다. 업계에서는 채권단의 신규자금 지원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현 영업원가구조로는 버티는데 한계가 있다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 외국계 애널리스트는 "이미 6개월 이상 투자가 뒤쳐져있는 하이닉스가 채권단 지원없이 D램시장에서 버티는 것은 한계가 있다"며 "당장 독자생존이 정답인지는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 하이닉스는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게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당장 한빛은행과 외환은행 등은 이날 이사회 부결발표 직후 신규지원이 어렵다는 입장을 못박았다. D램 경기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여부도 예측이 쉽지 않다. 협상결렬 소식은 그간 하이닉스와 마이크론 협상타결에 대한 기대감으로 오름세를 보이던 D램가격을 다시 끌어내릴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이에 따라 하이닉스가 결국 채권단의 지원을 끌어내지 못한다면 독자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전제 아래 법정관리 등 청산절차를 밟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정부와 채권단내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국내경제의 최대 불확실성을 안고 가느니 빨리 `안락사'시켜야한다는 논리도 다시금 대두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닉스가 법정관리로 간다면 소액주주와 종업원, 협력업체의 불안이 가중되는데다 대외신인도가 급락, 국가경제에 큰 충격파를 가져다줄 것으로 보여 현실적으로 선택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하이닉스 주변에서는 ▲채권단이 추가 채무재조정을 통해 하이닉스의 독자생존을 지원하거나 ▲아니면 작년 중반때 시도했던 대(對)중국 설비매각을 다시 추진하는 방안이 검토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노효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