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린 브로코비치". 올해 줄리아 로버츠가 아카데미여우주연상을 받은 작품 제목이자 영화속의 여주인공 이름이다. 캘리포니아주의 가스전력공급회사인 PG&E 공장에서 유출된 "크롬6"라는 중금속 오염으로 피해를 본 주민 6백34명을 대신해 집단소송을 제기하는 과정을 엮은 영화다. 에드워드 마리스 변호사팀의 일원인 에린은 눈물겨운 노력끝에 회사측으로부터 3억3천만달러의 보상금을 타낸다. 에린은 지라디&키즈라는 LA법률회사에서 일하는 실존 인물이고 영화내용도 실제 상황을 각색했다. 이 영화는 '집단소송'이 무엇인지를 쉽게 설명해준다. 피해 총액은 많으나 피해자가 다수일 때 개별적인 피해액은 그렇게 크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개인적인 소송은 어렵다. 이런 경우에 피해자 집단의 대표자가 소송을 진행하고 그 결과를 함께 누리는 제도다. 영화에선 주민들의 승리가 크게 부각된다. 하지만 실제 진정한 승자는 주민들이 아니라 소송비용 1천만달러를 빼고도 보상금의 40%인 1억3천3백만달러를 챙긴 변호사라는 점은 스토리에 빠져 있다. 자칫 악의적인 소송에 휩싸일 경우 기업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자금을 빼앗겨 경쟁력을 잃게 되는지도 가려져 있다. 지난달초 이기호 경제수석은 '서울'에서 활동하는 외국 기업인들의 모임에서 우리도 집단소송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기업 경영을 투명하게 하고 투자자들을 보호하겠다는 취지에서다. 공교롭게도 며칠 뒤 '뉴욕'에서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 기업들의 모임인 코참(주미한국상공회의소) 주최의 세미나가 열렸다. 제목은 '미국 집단소송과 대책'. 집단소송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세미나였다. 연사로 초대된 리처드 스티어 변호사는 "미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집단소송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며 "자칫 잘못 대처하면 회사 영업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에선 이제 "집단소송제는 거대 기업들의 횡포를 막고 투자자를 보호한다는 '득'보다는 기업들의 경쟁력을 앗아가 결국 투자자들에게 손실을 주는 '실'이 더 많은 제도로 평가"(김창욱 딜로이트&투시 한국부대표)되고 있다. 2년동안 전국적인 화제를 모으며 진행되다 지난 1월 합의에 도달한 매스뮤추얼보험의 집단소송은 대표적인 예. 보험료는 통상 일시불로 내면 할인해주고 분납하면 일정 금액을 더 내도록 하는 게 관행이다. 그러나 개인투자자들의 돈을 모아 펀드 형태로 운영하는 이 보험회사는 계약서에 이에 대한 설명을 분명히 명시하지 않았다. 게리 던컨이란 변호사가 이같은 약점을 잡고 보험 가입자들을 모아 집단소송을 냈고 결국 합의에 이르렀다. 합의 내용은 분납하면 일정 금액을 더 낸다는 사실을 계약서에 분명히 기재하고 고객들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무료 전화를 설치하라는 것. 합의를 이끌어낸 변호사에게는 일시금 5백만달러,평생동안 매년 25만달러,3백만달러가 약정된 생명보험 등 모두 1천만달러에 상당하는 수임료가 지급됐다. 결국 회사의 주인인 투자자와 고객들은 한푼도 챙기지 못한 채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어 변호사의 배만 불린 셈이 됐다. 미국 의회는 이같은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집단소송 남발을 막으려고 1995년 소송 요건을 엄격히 제한하는 증권민사소송개정법(PSLRA)을 만들었고 98년엔 증권소송기준법(SLUSA)을 통과시켰다. 적용 기준이 까다로운 연방법원에서만 다루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아무리 법을 강화해도 집단소송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올들어 지난 7월말까지 증권 관련 집단소송만 2백61건이 제기됐을 정도다. 하루 한건 이상이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관계자는 "주식회사 미국(Corporate America)의 경쟁력의 발목을 잡고 있는 집단소송을 막기 위한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며 "그 방향은 증권관련법에 의한 기업회계 강화,내부자거래 감시 등 평소의 감시 기능을 강화하는 쪽"이라고 말한다. 한국과는 정반대 방향이다. 뉴욕=육동인 특파원 dong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