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스펀은 "뜻밖의 일을 예상하는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처음에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듯한 일이 커지기 때문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시장의 의표를 찌름으로써 효과를 극대화하는 그린스펀의 행보는, 그가 말한대로 ''다른 사람이 예상하지 못한'' 조치를 끊임없이 상상하면서 키워온 감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을까.

그린스펀의 상황인식 및 대응방식은 시장참여자로서도 새겨둘 만 하다. 금리인하 요구는 끊이지 않았지만 예상은 나오지 않았다. 기습적인 금리인하는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가능은 한 일이라는 확률을 염두에 두고 포트폴리오를 구성했더라면...

그의 금리인하가 미국 경제 및 증시를 상승추세로 되돌려놓을 지 논의는 뒤로 돌리자. 또 그가 ''금리정책은 정례 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결정하는 편이 바람직하다''는 자신의 말을 번복한 것도 접어두자.

◆ 미 금리인하 해일(海溢), 강도 주목 = 18일 수요일 그린스펀의 깜짝 금리인하가 전세계 증시를 한차례 순환한 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금리인하는 수요일 뉴욕증시의 다른 모든 요인을 압도하면서 주요 지수를 수직상승케했다.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400포인트 가까이 치솟은 뒤 3.91% 높은 10,615.83에서 폭주하는 거래를 막았다. 나스닥지수는 한달음에 2,000선을 훌쩍 뛰어넘었다. 나스닥지수는 사상 네 번째 상승률인 8.12%를 기록하며 2,079.44로 마쳤다.

나스닥선물은 뉴욕증시 종료 후 시카고상업거래소(CME)에서 이틀째 상한가에서 밤을 새면서 아시아 증시 참여자에게 탄탄한 신뢰감을 심어줬다.

19일 목요일 일본 닛케이지수는 14,099.49까지 3.35% 치솟은 뒤 포만감에 내려서 13,868.28를 기록했다. 전날 마감가에 비해 1.66% 올랐다. 홍콩 항생지수는 13,548.95로 4.44% 급등했다.

국내 증시도 거센 상승파도를 탔다. 외국인이 앞장선 가운데 종합지수와 코스닥지수가 한때 각각 7.70%, 6.28%까지 솟구쳤다. 외국인이 삼성전자와 현대전자 등 반도체주와 한국전력, 삼성전기 등 우량주, 그리고 금융주 등에 기록적인 매수세를 집중했다. 외국인은 이날 거래소에서 6,715억원, 코스닥시장에서 542억원 매수우위를 보였다.

종합주가지수는 전날보다 23.31포인트, 4.32% 오른 563.31을 가리켰다. 코스닥지수는 2.71포인트, 3.75% 상승한 74.90을 나타냈다. 거래가 폭발, 거래소에서는 5억5,874만주, 3조5,271억원 어치가 손을 옮겼다. 거래소 거래량은 지난 1월 16일 이후, 대금은 같은달 12일 이후 가장 많았다.

올들어 네 번째이며 비정례로는 두 번째인 이번 금리인하의 효과는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

전날 이미 금리인하를 맛 본 유럽증시를 통해 가늠해볼 경우, 벌써 세력이 누그러졌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국내 시각으로 6시 56분 현재 영국 FTSE 100 지수는 0.50% 하락, 5,860.40을 기록중이고 독일 DAX 지수도 0.50% 내려 6,132.38에 머물러 있다. 전날 FTSE 100 지수는 2.2% 올랐고 DAX 지수는 3.9% 급등했었다.

화요일 오후부터 상한가를 고수하며 금리인하를 예고하는 듯 했던 나스닥선물도 미끄러져 내렸다. 나스닥100 지수선물은 오후 7시 10분 현재 10.50포인트 높은 1,850.00을 가리키고 있다. S&P 500 지수선물은 하락전환, 2.70포인트 낮은 1,243.50에 거래됐다.

◆ 금리인하와 경기둔화의 레이스 = 그린스펀은 올들어 넉달이 채 안돼 연방기금금리 목표치를 2%포인트나 내렸다. 그것도 두 차례는 시장이 예기치 않은 시점을 택해 최대의 효과를 끌어냈다.

월가 일각에서는 ''그린스펀이 서둘러 금리를 낮춘 건 일반인이 보지 못한 중대한 위험요인을 감지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추측을 내놓았다. 그러나 설득력이 없다. 새해 벽두 금리정책을 두고도 ''물밑 암초''가 과연 무엇인지를 두고 여러 가설이 제기됐었다.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무수익자산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기 때문이라는 설까지 대두됐다.

의문은 FOMC 회의록이 6주 뒤 공개되면서 풀렸다. FOMC는 이미 지난 12월 19일 회의에서 경기추이를 지켜보며 금리인하를 단행하되 시기는 그린스펀에게 위임했던 것. 지난 1월 3일 그린스펀은 소비자신뢰지수가 급격히 악화된 시점을 택했다.

이번 금리인하도 사전에 받아둔 재량권을 바탕으로 단행됐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미국의 경제지표로 시점을 택한 것은 아닌 듯 하다. 미국 주요 지표는 최근 여전히 저조한 모습이었지만 심각한 상태로 빠져들지는 않았다. 지표들은 더구나 엇갈린 방향을 가리키며 중간 금리조치를 긴급하게 요구하지 않았다.

생산자 및 소비자물가는 안정된 모습으로 금리인하의 여건을 제공하긴 했다. 그러나 실업률이 상승하고 소비자신뢰지수, 경기선행지수 등이 다소 악화된 반면 산업생산은 반등했다. 3월 산업생산은 전달 0.6% 감소했다가 0.4% 상승으로 반전한 것. 또 기업재고는 2년만에 처음으로 줄었다.

FRB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FRB는 금리인하 보도자료를 통해 "기업의 설비투자가 감소하고 있으며 수익성 저하와 향후 경기의 불확실성이 앞으로 설비투자를 망설이게끔 할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러한 제약이 주식자산 가치 저하로 인한 소비 감소, 그리고 해외 경제성장률 둔화 등과 함께 미국 경제활동을 용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둔화시킬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표현만 다를 뿐, 지난 3월 20일 FOMC의 보도자료에 다 나온 얘기다.

그럼 도대체 그로 하여금 금리를 낮추도록 한 요인은 뭘까. 하나의 가설을 제시하자면 이번 금리정책은 증시를 겨냥했다. ''주식자산 가치 저하로 인한 소비 감소''라는 대목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얘기다.

지난주 이후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증시에 기름을 붓는 행위라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 그린스펀의 노림수가 있다. 증시가 바닥을 다지는 듯 할 때, 더욱이 인텔효과로 한창 물이 올라 있을 때 금리를 낮춰 지수를 더욱 상승케 한 것이다.

지난해 말 이후 내리막을 걷고 있는 미국 경기가 심상치 않은데다, 증시를 그대로 둘 경우 전저점을 깨며 하락할 확률이 없지 않다. 이 경우 부의 자산효과로 미국 경제는 걷잡기 힘든 지경으로 빨려들게 된다.

물론 그린스펀은 ''중앙은행은 증시에서 돈을 잃은 투자자를 구해주라고 있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뉴욕증시의 속락을 예의주시하며 대응을 고민하고 있는 사람도 그린스펀이다. 증시와 경제를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87년 FRB의장으로 부임, FRB의 다른 멤버들이 증시에 둔감하다는 데 놀랐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린스펀은 미국 경기 둔화 압력과 지난 세차례 1.50%포인트 금리인하의 효과를 저울질했다. 증시가 약세권 등락을 지속할 경우 마지노선으로 남은 소비지출까지 무너지며 경기를 곤두박질치게 할 것이다. 이번 금리인하는 이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된다.

특히 인텔의 하반기 낙관론으로 증시가 반등흐름에 있을 때를 택함으로써 지수의 상승폭을 최대한 벌려놓았다. 증시를 충분히 올려 놓음으로써 증시가 내리면서 경기에 되먹임되는 시간을 벌자는 심산이다. 금리인하가 경기둔화를 앞질러 미국 경제를 부드럽게 반등토록 할지 주목된다.

목요일 뉴욕증시에도 대표적인 종목의 실적발표가 줄지어 대기하고 있다. 기술주 가운데서는 컴퓨터업체 선 마이크로시스템즈와 게이트웨이를 비롯해 PMC시에라, 자일링스 등 반도체업체가 장 종료 뒤 실적을 내놓는다. 세계 최대 저장장치 업체 EMC도 개장전 발표를 앞두고 대기중이다. 이밖에 잉크토미, 콜게이트, 델파이, 포드, 폴라로이드, 시어스 로벅 등이 있다. 경제지표로는 지난주 신규실업수당 청구건수가 예정돼 있다.

◆ 국내증시 변수 및 개별 요인 = 목요일 국내 증시에서도 실적발표가 잇따랐다. 한빛은행은 지난 1/4분기 1,134억원의 순익으로 분기흑자로 돌아섰다고 발표했다. 주택은행은 2,230억원의 순익을 기록했다.

옥션은 영업손실 10억여원을 입었지만 이자수익 등으로 순익은 7억4,500만원을 거뒀다. 인터넷 보안업체 퓨처시스템은 지난 1/4분기 매출이 42.1% 급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업이익은 80.9% 줄어든 3억원으로 추정됐다.

뉴욕증시와 달러/엔 환율에 따른 원화의 등락에도 관심이 모아질 전망이다. 전날 증시에서는 환율이 1,300원 아래로 급락하면서 해외시장 매출 비중이 높은 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 등에 대해 외국인이 비중을 축소한 바 있다.

적대적 인수합병(M&A)를 위한 사모펀드가 다음주부터 자금을 유치하게 돼 유동성이 보강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강하게 형성되고 있다.

한편 한국개발연구원(KDI)은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5.1%에서 4.3%로 하향조정했다. 물가상승률은 3.4%에서 4.2%로 수정전망했다. 경상수지 흑자폭은 92억달러에서 134억달러로 늘려잡았다.

한경닷컴 백우진기자 chum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