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가 동쪽으로 왔다.

그러나 그보다 2백년 앞서 바다 건너 온 것이 있다.

"평생 한 마디도 설한 바 없다"는 말을 남기고 열반에 든 석가모니.

다비후 수습된 8곡 4두의 사리는 8개 부족에 분배되었고 그중 5백립이 중국에 전해졌다.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549년.

신라 선덕여왕때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것이 오대산 적멸보궁에 모셔져있다.

서울에서 평창을 거쳐 비포장 도로를 10km 달리면 세조가 문수보살을 만나 피부병을 고쳤다는 계곡 아래 당도한다.

오대산 맑은 물에 목욕하던 세조는 난데없이 나타난 동자승에게 등을 밀어달라고 했고 동승은 "어디가서 임금님 옥체 씻었단 말 하지 말라"는 주문에 "어디가서 문수보살 친견했다 소리 말라"고 했다.

문수보살의 영험일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딸 의숙공주도 문수보살상을 제작,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오대산 월정사의 말사인 상원사(주지 정념)는 셋방살이 처럼 다소 옹색해보인다.

그러나 선원의 승풍은 추상같다.

상원사 청량선원은 조계종 종정을 지낸 한암스님이 죽을때까지 머물던 곳.

"천고(千古)에 자취 감추는 학이 될 지언정 삼춘에 말 잘하는 앵무새가 되지 않겠다"며 도시를 떠난 스님은 산방에서 눈을 뜬채 앉아 열반했다.

그 제자였던 보문 스님은 마취를 하지 않고 수술을 받을 정도.

세번째로 갈비뼈를 절단할때에서야 가느다란 신음을 내뱉었다.

나중에 그 이야기를 들은 보문 스님은 "내 공부가 그것 밖에 안 되었나"하고 탄식했다.

상원사 청량선원 스님들의 결기는 적멸보궁에 모셔진 진신사리의 영향일까.

상원사에서 다시 1km를 올라가면 비로봉 아래 작은 법당이 나타난다.

보배로운 궁전이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한 집.

십악팔사를 물리치면 마음이 곧 적멸보궁이지만 아직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여 중생들은 염주와 불경을 바리바리 싸들고 해발 1천1백50m 산사에 오른다.

이름하여 부처님 정골사리 봉찬 법회.

"일타 스님 어머니는 출가할때 아이들 도시락 반찬하라고 북어를 산더미 처럼 찢어 놓고 갔다잖아요.

너무 많아서 초등학교 졸업할때까지 먹고 남았대요.

주부가 집 떠나면 남은 사람이 고생인데 기도나 부지런히 해야지요"

부처님의 기운을 쐬려고 일부러 깊은 산을 찾아온 중년 부인 하나가 다시 염주를 그러쥔다.

30일 작정항 기도.

벌써부터 집안 걱정이 앞선다.

속세는 그렇게 떠나기 힘든 것.

그래서 속세를 떠난다는 뜻의 속리를 산이름으로 하고 불법에 머무른다는 의미의 법주를 절 이름으로 했는지 모른다.

조촐해서 더욱 아름다운 극락이다.

"오대산은 바위가 드문 흙산입니다.

어머니 대지 같대서 육산이라고도 하죠.

풍수지리에 따르면 적멸보궁 위치가 좋아 우리나라 스님들이 먹을 것 걱정 안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요즘 말이다.

일제시대 만해도 수행에 들어가기전 1년 먹을 산채를 한꺼번에 뜯었다.

지금은 성역화사업이 한창 진행이다.

상원사에서 적멸보궁 가는 길,중대 사자암 밑에 비로전을 세운다.

산밑 주차장에서 걸어서 1시간.

불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은 오대산을 포함,양산 통도사,영월 법흥사,설악산 봉정암,태백산 정암사 등 5곳에 있다.

< 오대산=윤승아 기자 ah@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