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하십니다. 한경 애독잔데요, 지금 나스닥 상황이 어떤가요"

야간 당직을 서다보면 밤늦게 이런 전화를 종종 받는다.

하루 평균 20통 정도는 걸려온다.

주로 30~40대 직장인들이다.

개중에는 나이 지긋한 퇴직자나 "푼돈"을 증시에서 굴린다는 주부들,
할머니도 끼어있다.

미국 증시상황을 봐서 다음날 투자 전략을 짜려는 투자자들이다.

미국에서 금리를 결정하는 날 같은 때는 아예 전화통에 불이 난다.

금리인상 여부에서부터 뉴욕증권거래소와 나스닥 시황, 외신들의 논조까지
물어온다.

"오늘밤 나스닥이 내일 아침 코스닥을 이끈다"는 "증시동조화" 현상이
태평양 건너 국내 투자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증시동조화현상은 투자자들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 같다.

우선 언어 생활을 보자.

증시가 활황을 보이면서 스톡옵션, 데이 트레이딩(초단기매매) 등 몇년전
만해도 생소했던 단어들이 어느새 우리 입에서 자연스럽게 오르내리고 있다.

직장인들의 생활패턴은 또 어떤가.

점심을 햄버거로 때우고 남는 시간에 투자전략을 짜는 미 샐러리맨들의
모습을 우리 주위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주가 시세판을 스크린세이버(화면보호기)로 만들어 놓고 틈날 때마다
인터넷으로 주문을 내는 직장인들의 모습도 14시간 시차가 나는 뉴욕 사무실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기업 경영문화도 마찬가지다.

증시에서 들어온 돈으로 기술개발보다는 "재테크"에 열중하는 "무늬만 벤처"
인 기업들이 판치는 것도 실리콘밸리와 닮은 꼴이다.

세밑 모임마다 주식 얘기가 단연 "톱"이고 게임방도 모자라 내년부터는
편의점에서도 주식투자를 할 수 있게 한다는 대목에서는 제아무리 "주식국가"
미국이라 해도 한국에서 한 수 배워야 할 참이다.

그러나 빛이 밝으면 그만큼 그늘도 짙은 법.

줄잇는 20~30대 갑부들 속에서 봉급 인상에 목매다는 샐러리맨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커져만 간다.

주식투자에 실패하자 홧김에 12명을 총으로 쏴죽이고 자살한 한 미국 투자자
의 일탈적 행동이 한국에서는 없으리라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바야흐로 지난 한해와 한세기를 차분히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때다.

억대 스톡옵션도 좋고 연일 상한가도 좋다.

그러나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증시 열풍이 가져올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도 한번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때다.

< 박수진 국제부 기자 parksj@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