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과 투신 증권 등 80여개 금융기관들이 23일 합의한 안정대책은 "금융
시장을 상대로 한 고도의 심리전"으로 볼수 있다.

공적자금 투입이나 배드펀드 설립과 같은 국민세금을 활용한 즉각적이고
실효성있는 대책은 이번 합의문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대신 정부는 은행과 투신사에 "공조체제"를 구축토록 함으로써 기관이기주의
에 의한 "자살게임"을 중단하는데 중점을 뒀다.

공적자금 카드를 내보이며 "대우사태 이후의 생존"도 사실상 보장했다.

금융기관들을 안심시켜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겠다는 것이다.

발표된 합의내용만을 놓고 본다면 이번 대책은 알맹이가 없다.

금융기관과 투자자의 불안심리를 털어내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자금흐름이 경색됐거나 시스템이 붕괴돼 금융시장이 교란되는게 아니라
시장에 참가하는 투자자와 금융기관의 불안심리가 사태를 꼬이게 만들었다고
보는 정부의 인식이 그대로 나타난다.

이날 발표된 내용중 그나마 눈에 띄는 것은 "금융기관 합동 실무협의회"
이다.

은행과 투신 증권 등 관련업계가 모두 참여하는 실무협의회를 만들어 문제를
풀어가겠다는 것이다.

이동호 은행연합회장은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은행 투신 증권이
함께 참여하는 실무협의회를 구성하는 방안을 23일 확정하겠다"고 말했다.

대우사태로 인해 발생할수 있는 금융시장의 현안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갈수
있는 "틀"이 마련됐다는 점에서는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나머지 합의내용은 이미 나왔던 대책들이다.

"불요불급한 수익증권 환매를 자제한다" "대우협력업체에 대한 자금지원에
적극 협조한다" "수익증권 환매에 대응하여 상품개발 등 신규자금 유치에
적극 노력한다" 등의 구호성 결의는 지금까지 발표된 대책들과 다를게 없다.

더욱이 간담회가 끝난 뒤 정부와 금융기관간에 대책의 내용 등에 대한
해석이 판이한 것으로 드러나 시장혼란만 부채질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금감위는 이날 합의문에 포함시키지는 않았지만 은행에 "대우 또는 투신사
를 지원했다가 자기자본부족 사태가 발생하는 경우에는 BIS 자기자본비율을
탄력적으로 적용하겠다"고 밝혔다고 배창모 증권업협회장은 전했다.

그러나 김영재 대변인은 이를 부인했다.

김 대변인은 또 새 자산건전성 분류기준을 변경할 뜻도 없다고 밝혔다.

정부가 금융기관의 생존을 규정과 기준을 바꿔가며 보장할 의사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김 대변인은 "국제통화기금(IMF)와 합의한 내용을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금감위가 "대우채권 환매자금에 대한 사실상 정부보증"을 언급했다는 대목
에서도 한때 논란이 일었다.

금융 전문가들은 이날 발표된 시장안정대책에 대해 시장이 어떻게 반응할지
관심을 쏟고 있다.

이날 주가가 오르고 장기금리도 안정세를 보였으나 이는 무디스의 한국신용
등급 상향조정설이 오히려 큰 영향을 미쳤다는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금융기관들이 정부가 생각한대로 움직여줄지, 투자자들이 정부와 금융기관
을 신뢰하고 따를지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이다.

앞으로 2,3일은 지나봐야 이번 안정대책에 대한 시장의 평가가 분명해질
것 같다.

< 현승윤 기자 hyunsy@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8월 2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