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과 외면 속에 지킨 정체성…다큐 '나는 조선사람입니다'
유도 선수 안창림은 재일 동포 3세다.

그는 지난 도쿄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고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경계인으로 사는 재일 동포들의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윤여정이 주연하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질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는 재일조선인 4대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다.

일제강점기와 전쟁, 분단이라는 아픈 역사의 희생자이면서도 여전히 차별받고 있고, 차별 속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이들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잘 알려지지 않았다.

김철민 감독의 세번째 장편 다큐멘터리 '나는 조선사람입니다'도 그렇게 시작됐다.

김 감독은 2002년 금강산에서 열린 청년들의 통일행사를 기록하러 갔다가 처음 재일 동포들을 만났고 그들의 존재를 몰랐던 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후 일본을 오가며 재일 동포들을 만나왔다.

국가보안법 피해자 가족의 삶을 담은 전작 '불안한 외출'(2014)을 통해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들을 만났고,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음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하려면 재일 조선인의 역사를 살펴야 했다.

그렇게 '나는 조선사람입니다'에는 식민 지배로 일본 땅에 발을 들이게 된 1세부터 그곳에서 태어나 전쟁과 분단, 생계 문제 등으로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2∼4세까지 역사를 증언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차별과 외면 속에 지킨 정체성…다큐 '나는 조선사람입니다'
그들이 떠나온 고향은 '조선'이었기에 광복 후 조국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며 조선학교를 세우고 조선말과 조선글, 조선의 역사를 가르쳤다.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던 조국에서는 전쟁이 벌어졌고 땅은 갈라졌다.

동포들 역시 남한을 지지하는 재일대한민국민단(민단)과 북한을 지지하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로 갈라졌다.

남한 정부는 총련을 배척했고 조국이 궁금하고 그리워 남한으로 유학 온 재일조선인 2세 강종헌, 이동석, 이철은 북한의 지령을 받은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감옥에서 청춘을 보냈다.

3세와 4세들은 조선학교를 무상교육 지원대상에서 배제하는 일본 정부와 '김치', '바퀴벌레'라고 조롱하며 '차별이 싫으면 돌아가라'고 위협하는 극우단체와 일본인들에 맞서 조선학교를 지키기 위해 여전히 싸우고 있다.

교토 조선 제3초급학교 교장인 재일조선인 3세 강수향 씨는 정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학교를 떠나지 않고 발달장애가 있는 어린 학생을 안고 다니며 돌보고 있다.

아이들을 조선학교에 보낸 부모들은 학교에 찾아와 헤이트 스피치를 일삼는 극우단체 재특회(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와 트라우마 때문에 날카롭게 깎은 연필을 방어무기 삼아 들고 다니는 9살 아이의 이야기를 전하며 눈물짓는다.

이런 상황에서도 재일한국청년동맹(한청)에서 활동하며 열심히 한국말을 배우는 젊은이들과 일본 문부성 앞에서 '조선학교 차별철폐'를 외치는 청소년들, 노래로 한국말을 배우는 어린 학생들은 밝은 모습을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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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감독은 23일 시사회 이후 열린 간담회에서 "식민지 분단의 역사를 증언하는 분들의 존재 자체를 잘 모르는 분들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며 "아픈 역사를 극복하기 위해 저항하는 분들의 삶을 통해 청산하지 못한 식민지배와 분단 문제도 다시 고민하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간담회에는 영화에도 등장한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강종헌 씨와 이동석 씨도 참석했다.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유학 와 서울대 의대를 다니다 1976년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으로 사형 판결을 받고 13년을 복역한 강종헌 씨는 '분노하되 증오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

그는 "증오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끝나버리지만, 분노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공유할 수 있다"며 "분노를 에너지 삼아 세상을 바꾸고 기쁨으로 나눌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씨는 "일본 대학에서 평화와 인권을 주제로 가르치는데 '한반도를 모르면 일본을 모르는 것이다.

일본이 과거에 어떤 잘못된 길을 걸었는지 한반도를 통해 알 수 있다'고 말한다"며 "여기서는 재일 동포의 역사를 모르는 것은 조국을 모르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영화를 통해 역사의 아픈 부분도 발견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12월 9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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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