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후쿠오카·도망친 여자…데뷔 30년 "난 운 좋은 사람"

극장가 여름 성수기 포문을 연 '반도'와 재중 교포 출신의 거장 장률 감독의 신작 '후쿠오카', 그리고 베를린국제영화제 수상작인 홍상수 감독의 '도망친 여자'까지.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세 편의 영화로 만나는 배우 권해효
배우 권해효(55)는 지난 7월부터 한 달에 한 편씩 화제작으로 극장 관객을 만나고 있다.

'반도'에서는 좀비 떼로 폐허가 된 땅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을 위해 희망을 놓지 않는 김 노인이었고, '후쿠오카'에서는 28년 전 사랑했던 여자의 고향 후쿠오카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남자였다.

오는 17일 개봉하는 '도망친 여자'는 주인공 감희(김민희)와 세 명의 여성 친구들이 중심인 영화라 권해효는 그다음으로 이름을 올렸으나 아직 구체적인 역할은 알려지지 않았다.

1990년 연극 '사천의 착한 여자'로 데뷔한 지 만 30년, 이후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그랬듯,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일 테다.

'후쿠오카' 개봉 당시 만난 그는 "편안해지지 않는 작품을 하고 싶은데 그게 어렵다"며 "30년이 별 건 아닌 것 같고, 그저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작품이 끝날 때마다 실업자가 되는 자영업자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늘 있지만, 스트레스 받지 않고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직업이 꿈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영역이다 보니 지금까지 정말 운 좋게 왔다"고 강조했다.

"사실 꿈은 평생 놀고먹는 거예요.

내 몸을 팔아서 누군가의 것을 빼앗지 않고 살아온 건 복이지만, 배우가 천직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30대 때는 늘 언제든 때려치울 거라고 말하고 다녔으니까요.

"
방송 3사의 탤런트실이 어디인지 모르고, 영화인끼리 친목 모임을 하지도 않았다.

영화 바깥에서, 자신이 머무는 세상과 '거리두기'를 해 온 시간이 오히려 도움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세 편의 영화로 만나는 배우 권해효
한 검색 사이트는 권해효를 배우 겸 사회운동가로 소개할 만큼 그는 시민사회 영역에 발을 담그고 있다.

오랫동안 한국여성단체연합 홍보대사로 여성의 날 행사를 진행해 왔고, 재일 조선학교를 지원하는 단체 '몽당연필'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아주 어릴 때 방송국에 처음 갔을 때 너무 거대해 보이더라고요.

여기에서 뭔가 하겠다고 쫓아가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절박하게 무언가를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겠지만, 절박하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던 것 같아요.

'아니면 말고' 하지 않으면 닥쳐올 일을 견디기 어려울 거라는 판단에 선택한 처신 같은 거였죠.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좋은 색시와 살기 때문입니다.

하하."
그의 아내는 그가 주연한 홍상수 감독의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 '그 후'(2017)에 함께 출연했던 연극배우 조윤희다.

그는 결혼 생활 만 24년 동안 나흘 이상 아내와 떨어져 본 것이 2018년 봄 열흘 정도의 '후쿠오카' 촬영이 처음이었다고 했다.

촬영 시간이 아니면 자전거를 타고 혼자 도시를 돌아다녔고, 배우들은 각자 작은 숙소에 묵으며 생활했다.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세 편의 영화로 만나는 배우 권해효
'도망친 여자'는 '다른 나라에서'(2011),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2016),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 '그 후', '강변 호텔'(2018) 이후 여섯번째로 홍 감독과 함께 한 영화다.

대표적인 두 작가주의 감독과의 작업에 대해 그는 "홍 감독의 영화는 아침 촬영 전까지 뭘 찍을지 아예 모르는 상황에서 들어가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고, 장률 감독의 영화는 촬영 공간에서 느껴지는 것들, 리허설하다 만들어지는 순간들이 영화에 담기는데 텍스트와 다른 재미가 있어서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했다.

실제 '후쿠오카'의 결말은 촬영 첫날 촬영분이 없던 권해효가 구경 삼아 현장에 놀러 갔다가 만들어졌다.

또 "홍 감독의 영화가 대화를 깊이 있게 귀 기울여 듣게 하고 사람 관계의 긴장감을 준다면, 장 감독의 영화는 모르는 곳으로 소풍 가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홍 감독의 촬영 현장에서는 아침에 써서 준 대본을 붙잡고 대사 자체에만 집중하게 된다면, 장 감독은 대본에서 톤과 분위기만 주고 현장에서 배우가 놀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고.
그는 언제부턴가 촬영 현장에서 모니터를 잘 하지 않는다고 했다.

"시나리오 읽고 대화할 때는 영화의 방향을 이야기하는데, 모니터링을 하면 자꾸 내가 잘했나 못했나 평가하게 되더라"며 "영화관에서 처음 볼 때가 좋다"고 했다.

언제나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그이지만 "나이 들면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삶이 그렇게 만만치 않다"며 웃었다.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세 편의 영화로 만나는 배우 권해효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