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니 데이 인 뉴욕'(A Rainy Day in New York)

미국 뉴욕 근교에서 대학을 다니는 젊은 커플은 부모 몰래 뉴욕 맨해튼에서의 환상적인 주말 여행을 계획한다.

근사한 호텔과 레스토랑을 예약했고, 계획은 빈틈없이 짜여졌다.

이들의 꿈같은 여행은 계획대로 실행될 수 있을까.

[영화 속 그곳] 여행은 계획대로 실행될 수 있을까
소설가 김영하는 '여행의 이유'에서 "대부분의 여행기는 작가가 겪는 이런저런 실패담으로 구성돼 있다.

계획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오는 그런 여행기가 있다면 아마 나는 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가 말한 대로 많은 여행은 마치 여행기의 실패담을 쓰기 위해 존재하는 듯 수많은 어긋남과 시행착오로 점철된다.

우디 앨런의 신작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은 삶의 어긋남에 관한 영화다.

그의 많은 영화가 그렇듯이 뉴욕이 배경이고 재즈가 흐른다.

이번엔 아예 재즈를 좋아하는 남자 주인공 개츠비(티모시 살라메 분)가 직접 피아노를 치며 노래도 부른다.

[영화 속 그곳] 여행은 계획대로 실행될 수 있을까
개츠비는 영화를 좋아하는 여자친구 애슐리(엘르 패닝 분)가 유명 영화감독을 인터뷰하러 뉴욕으로 가는 김에 애슐리와 뉴욕에서 멋진 주말을 꿈꾸며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누구나 짐작하듯 계획은 번번이 빗나간다.

애슐리가 인터뷰하러 간 사이 개츠비는 거리에서 우연히 동창을 만나고, 옛 여친의 여동생인 챈(셀레나 고메즈 분)과도 조우한다.

여차여차 챈의 집까지 가게 된 개츠비가 거실에 있는 피아노를 연주하며 부르는 재즈 스탠더드가 바로 '에브리씽 해픈스 투 미'(Everything Happens To Me)다.

"골프 약속을 잡으면 반드시 비가 내려요.

파티를 열려고 하면 윗집 남자가 불평하구요.

감기에 걸리거나 기차를 놓치거나, 내 인생은 그런 일들이 일어날 거예요.

내겐 별일이 다 생겨요.

"
[영화 속 그곳] 여행은 계획대로 실행될 수 있을까
우디 앨런의 의붓딸 성추행 폭로와 반복되는 자기복제 논란 등 보기 전부터 실망을 예감해야 했던 영화지만, 개츠비가 가냘픈 목소리로 노래 부르는 이 장면만큼은 '멋지다'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다.

무엇보다 곡의 제목과 가사는 더없이 함축적이다.

영화의 줄거리와 맥을 같이할 뿐 아니라, 어찌 보면 85세 노감독의 추해진 말년에 대한 짧지만 극적인 변명처럼 들린다.

우디 앨런은 어쩌면 이 장면에 영화는 물론, 그의 인생, 철학, 그리고 재즈 애호의 엑기스를 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한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면 인간의 삶은 재즈를 많이도 닮았다.

자유로움을 추구하지만, 정체성은 버릴 수 없는 숙명이 그렇다.

거대한 목적과 이상, 형이상학에 대한 집착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영화 속 그곳] 여행은 계획대로 실행될 수 있을까
재즈 피아니스트 키스 재릿은 "어떤 곡을 연주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곡을 어떻게 연주해 내느냐가 중요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재즈는 결과의 음악이 아니라 과정의 음악이기도 하다.

'내겐 별일이 다 생겨요'야말로 재즈의 모토다.

재즈는 변주와 즉흥 연주를 통해 끝없는 시도와 어긋남을 반복한다.

이 속에서 '나'는 생성과 변화의 대상이자, 극복의 대상이지만, 결코 '나'의 궤도를 이탈할 수는 없다.

나를 지키면서 동시에 변화하는 것, 그것은 또 다른 자아와 대화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개츠비는 뉴욕에서 좌충우돌하며 하루를 보내는 동안 그의 인생에서 변곡점이 될 수 있는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은 심사숙고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매우 즉흥적이다.

하지만, 그 누가 개츠비의 선택을 진중함이 없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인생의 많은 선택은 그렇게 수많은 순간, 즉흥적으로 이뤄진다.

찰나는 사랑에 빠지기에도, 진실을 깨닫기에도, 진로를 결정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삶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즉흥적이다.

[영화 속 그곳] 여행은 계획대로 실행될 수 있을까
영화엔 그리니치 빌리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칼라일 호텔의 베델만스 바 등 뉴욕의 핫 스팟이 망라됐다.

눈요기에 부족함이 없다.

여기에 엔딩 로케이션은 특별하다.

개츠비가 찰나의 선택으로 찾아가게 되는 곳은 센트럴파크에 있는 델라코트(Delacorte) 시계다.

출판업자이자 자선가인 조지 T. 델라코트(1894∼1991)가 1965년 지어 헌납한 이 시계는 펭귄, 캥거루, 곰, 코끼리, 염소, 하마의 청동 조각상이 시계 하단을 장식하고 그 밑엔 아치형 통로가 있다.

30분에 한 번씩, 음악이 흘러나오고 동물상이 올라앉은 원판이 회전한다.

뉴요커들로부터 사랑받는 장소다.

영화에서 개츠비가 그랬듯이, 사람들은 만남의 장소로 시계탑을 선호한다.

우리 삶의 수많은 어긋남과 불확실성 속에서도 누군가와의 만남에서는 최소한 시간적, 공간적 좌표를 확인하고 싶기 때문일까.

[영화 속 그곳] 여행은 계획대로 실행될 수 있을까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0년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