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준엽 씨가 한경갤러리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 ‘빛의 정원에서’를 설명하고 있다.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전준엽 씨가 한경갤러리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 ‘빛의 정원에서’를 설명하고 있다.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중견 화가 전준엽 씨(60)는 한국적 토양에서 우리 특유의 소재를 붙잡아 작업하는 과정을 정성과 노동의 산물로 여긴다. 그는 먼저 다섯 차례의 바탕색을 칠한 뒤 사포로 표면을 다듬고, 나이프를 이용해 한국적 정서가 가득한 나무, 꽃, 새, 대나무, 푸른 강물 등을 밑그림으로 산수화처럼 그린다. 그 위에 유화 물감을 떨어뜨려 입으로 불거나 흘려 스며들게 하고 돌출된 부위에는 원액물감을 두껍게 발라 또 사포로 갈아낸다. 색이 스며들거나 번지는 효과가 더해져 작품의 분위기는 달빛처럼 부드럽다. 전통 산수화의 벽을 넘어서기 위한 작가의 의지가 놀랍다.

22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 1층 한경갤러리에서 시작한 전씨의 개인전은 작가가 작업에 쏟아부은 공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서양 물감으로 우리 산수의 아름다움을 표현해온 전씨는 2005년 현대적 화풍의 산수화인 ‘융합 산수’(일명 퓨전 한국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성곡미술관 동료 직원 신정아 씨의 투서 등에 의해 학예실장에서 물러난 뒤 전업작가로 활동하며 동양적 정신의 화풍에 서구의 현대적 조형을 융합하면서 스스로 붙인 용어다. 그의 융합산수론은 한국화의 기본 지침인 육법, 즉 기운생동(氣韻生動·멋), 골법용필(骨法用筆·필력), 응물사형(應物寫形·사생), 수류부채(隨類傅彩·채색), 경영위치(經營位置·구도), 전모이사(傳模移寫·모방과 창작)를 따르면서 수묵 대신 유화를 활용해 산수의 이미지를 그린 화풍이다.

‘빛의 정원에서’를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는 서양화의 아류를 뛰어넘어 동양적 사유와 감성을 화폭에 풀어낸 현대판 진경산수 20여 점을 걸었다. 작년 봄부터 지리산을 비롯해 설악산, 치악산, 내장산, 해남 달마산, 동해안, 부산 해운대, 담양 소쇄원 등을 여행하고 작업한 결과물이다.

전씨의 작품은 사색적이고 명상적이다. ‘빛의 정원에서’ 시리즈는 대상에 대한 과도한 집중과 묘사를 피하고 아름다운 자연과 청아한 빛줄기를 담아낸 작품이다. 산수 자체보다는 그것이 놓인 정경의 분위기를 포착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 금방 대바람 소리가 들릴 것 같은 푸르름이 침잠된 대숲과 쪽빛 정자에 앉아 망중한을 즐기는 사람 등에서 시정과 화흥(畵興)이 함께 풍겨나온다. 맑은 색감과 단순한 구도는 서양화이면서도 동양화의 청아한 맛을 더해 준다.

축약된 자연과 인생이 오버랩돼 문인화의 정취도 느끼게 해준다. 그는 “산수를 그리는 행위는 모든 것을 자연 속에 용해시키고 투명하게 기(氣)로 응축해 내기 위한 행위”라고 했다. 분노도 불안도 공포도 모든 것을 기운생동으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행위가 곧 그림이라는 얘기다.

최근 작품이 다소 변하고 있다. 화면이 밝아진 데다 다양한 색면에 나비와 고래, 호랑이 등을 집어넣어 변화를 시도했다.

“그림 속에 생명력을 다져내고 싶었어요. 고래 나비 등을 살짝 집어넣었더니 풍경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더군요. 화면도 더 풍성해지고 현대적 미감도 살아납디다.” 여행하며 느낀 삶의 여유와 운치를 자연과 융합해 화폭에 풀어낸 게 이채롭다. 전시는 6월8일까지.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