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극장 무대에 오른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국립오페라단 제공
2012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극장 무대에 오른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국립오페라단 제공
차갑고 어두운 단조풍 선율에 맞춰 러시아 황제 보리스 고두노프의 처절한 고뇌가 시작된다. 고두노프는 이반 황제의 계승자인 어린 드미트리 황태자를 몰래 살해하고 그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죽은 줄만 알았던 드미트리를 자칭하는 그리고리가 반란군을 이끌고 등장한다. 가난과 핍박에 시달리던 민중도 이들과 함께한다. 권력의 환희에 취해 있던 고두노프는 극도의 공포에 휩싸인 채 미쳐간다.

‘가장 러시아적인 오페라’로 꼽히는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1839~1881)의 대작 ‘보리스 고두노프’는 화려하고 서정적인 음악으로 연인의 사랑을 노래하는 이탈리아 등 서유럽 오페라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비장하면서도 음울한 러시아 특유의 분위기가 무대를 지배한다. 광활한 대륙을 가로지르는 듯한 폭발적인 합창이 객석을 압도한다. 마지막엔 권력과 인생의 허무함을 표현하며 한 편의 대서사시가 막을 내린다.

◆28년 만에 국내 관객 맞아

비장한 대서사…가장 러시아적인 오페라가 온다
국립오페라단이 오는 20~23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보리스 고두노프’를 올린다. 국내 오페라단으로는 초연이다. 1989년 러시아 볼쇼이극장의 내한 공연 이후 28년 만에 국내 관객을 맞는다.

피아노 모음곡 ‘전람회의 그림’으로 유명한 무소르그스키는 발라키에프, 보로딘, 큐이, 림스키코르사코프와 함께 러시아 국민주의 음악을 이끌었다. ‘러시아 5인조’로 일컬어지는 이들은 서유럽 음악을 선호하던 귀족에 맞서 러시아 고유의 민족 정서를 작품에 담고자 했다.

무소르그스키의 유일한 오페라인 이 작품에도 국민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게 묻어난다. 그는 러시아 민중의 설움을 극적으로 표현한 푸시킨의 동명 희곡을 바탕으로 오페라를 썼다. 고두노프(1552~1605)는 어린 황태자를 죽이고 러시아를 지배한 실존 인물이다. 이후 민란에 휩싸인 것도 작품과 같다.

연출가 스테파노 포다는 “러시아 고유의 한과 역사가 가장 잘 표현된 작품”이라며 “그 중심에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보다 더 복잡하고 방황하는 인간 고두노프가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무대도 고두노프 개인의 고뇌보다 러시아 역사를 관통하는 구슬프고 한 맺힌 정서를 살리는 데 초점을 맞춘다. 고두노프의 ‘나의 영혼은 슬프다’ 등 아리아보다 민중의 장엄한 합창을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다. 합창은 70여명의 스칼라오페라합창단이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부른다. 김학민 국립오페라단 예술감독은 “민중 자체가 또 하나의 주인공”이라며 “기존 ‘보리스 고두노프’ 공연보다 합창단의 역할에 더 특별한 의미와 해석을 부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언어 장벽’ 해소가 관건

오페라 애호가 사이에선 기대만큼 우려하는 시선도 있다. 국내에서 상연하는 오페라 대부분은 이탈리아어 또는 독일어로 부른다. 두 언어는 한국인 성악가에게 친숙하지만 러시아어는 생소하다. 국내에선 차이코프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제외하곤 러시아 작품이 무대에 오른 적이 거의 없다. 이번 무대에서도 러시아 성악가는 고두노프 역을 맡은 베이스 오를린 아나스타소프, 미하일 카자코프와 마리나 역의 메조소프라노 알리사 콜로소바뿐이다.

김 감독은 “국립오페라단은 판에 박힌 레퍼토리만 보여줘선 안 된다는 사명감을 갖고 이 작품에 도전했다”며 “러시아인만으로 구성했다면 언어적으로 완벽했겠지만 오페라에서 언어가 전부는 아니다”고 강조했다. 마리나 역을 맡은 메조소프라노 양송미는 “언어를 익히는 데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건 사실”이라며 “처음엔 끝까지 할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했지만 음악 안에서 모두가 하나돼 즐겁게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1만~15만원.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