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미란·이일화·김선영 '쌍문동 태티서' 활약

동네 골목길에서 놀던 아이들이 엄마의 "저녁 먹어"라는 외침에 집으로 뛰어들어가는 해 질 녘 풍경.
tvN '응답하라 1988'은 그런 정서를 담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집에서 고소한 음식 냄새가 나도록, 사람 사는 맛이 나도록 만들어 준 엄마가 있었다.

골목 평상이나 누군가의 집 거실에서 함께 나물을 다듬고, 오징어에 맥주 한잔하며 이런저런 수다를 떠는 엄마들의 모습은 끈끈한 정으로 똘똘 뭉친 쌍문동의 모습을 한눈에 보여줬다.

강인해 보이는 엄마는 사실 여리고 약했고, 가족들을 위해 사는 것만 같았지만, 사실은 엄마에게도 꿈이 있었다는 사실을 '응답하라 1988'은 드라마 전체에 걸쳐 이야기했다.

◇ 약하지만 강한 그 이름은 엄마
김정환의 엄마 '치타 여사' 라미란은 거침없는 입담에 남편의 정력에 불만이 많고 호피 무늬 옷을 즐겨 입는 '센 언니'.
동네에 좋은 일이 생기면 자기 집에 동네 사람들을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고 아들 정환이 시시때때로 "우리 엄마 라미란이야"라고 할 정도로 못할 것이 없어 보이는 여장부다.

하지만 초라해지기 싫어 처녀 시절 이야기에 허세를 더하고 자신 없이도 잘 지내는 남편과 두 아들에게 섭섭함을 느끼는 약한 모습도 있다.

집안일에는 만능이지만 영어를 읽지 못해 조금은 위축되기도 한다.

'응답하라' 시리즈 전작 '응답하라 1997'과 '응답하라 1994'에도 출연했던 이일화는 이번 편에선 조금 우울해졌다.

가부장적인 남편 성동일이 빚보증을 잘못 서 반지하방에서 빚에 시달리며 사는 데다 드센 첫째 딸 때문에 기를 펴려야 펼 수가 없다.

내 코가 석 자여도 불쌍한 사람은 도와야겠다는 남편은 배춧잎은 몇 장 들지도 않은 월급봉투를 가져와 놓고 반찬 투정을 해대지만 이일화는 알뜰살뜰 어떻게든 삼 남매를 키워낸다.

데모에 가담한 죄로 경찰에게 끌려가게 된 보라를 보호하기 위해 비를 맞으면서도 경찰의 앞을 가로막고 보라가 얼마나 착한 아이인지 설명하며 눈물로 읍소하는 장면은 그의 끓는 모정을 보여주며 많은 시청자를 울렸다.

빚이 해결되자 전작의 모습을 되찾아 반찬을 산처럼 쌓아놓고 뿌듯해하는 모습으로 웃음을 주기도 했다.

고등학생 아들 선우와 7살 난 딸 진주를 키우는 김선영은 남편을 잃었음에도 씩씩하게 잘 사는 듯 보였다.

착하디착한 아들은 간이 안 맞는 음식에도 맛있다며 엄지를 들어줬고 어린 딸은 사탕 하나 아니면 장난감 하나만 있으면 얌전히 혼자 잘도 놀았다.

아들의 죽음을 며느리 탓으로 돌리고, 남편이 남긴 집마저 경매에 넘기는 비정한 시어머니 때문에 눈물도 흘리지만, 선영은 아들 몰래 목욕탕 청소까지 해가며 약하지만 강한 엄마의 모습을 보여줬다.

◇ '쌍문동 태티서' 엄마에게도 꿈은 있다
가족밖에 모르는 듯한 엄마 3인방이지만 그들에게도 꿈은 있었다.

라미란은 평소 무뚝뚝한 표정 뒤에 숨겨뒀던, 끓어오르는 끼를 두 동생 이일화·김선영과 함께 '전국노래자랑'에 나가 분출하려 했지만, 긴장감을 풀려고 먹은 술 때문에 예선 심사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전국노래자랑'은 그에게 이루지 못한 꿈이었다.

다시 찾아온 기회에서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연습했지만 테이프가 바뀌는 바람에 원래 준비했던 '황홀한 고백' 대신 계란 판매상의 구성진 '계란이 왔어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주를 입으로 부르며 춤을 추던 그는 '땡' 하는 탈락 소리에도 굴하지 않고 춤과 노래를 계속하는 열정을 보여줬다.

이일화는 남편의 빚을 청산한 뒤 꼬박꼬박 적금을 붓는다.

반지하를 벗어나 아파트로 가는 것이 그의 꿈. 남편 성동일이 "그렇게 들여다볼 거면 아예 벽에 붙여놓으쇼" 할 정도로 매일 매일 통장을 바라보고 쓰다듬는다.

빚은 언제 다 갚을지, 언제쯤이면 온전한 월급을 받아볼 수 있을지, 아이들은 언제 다 키울지 막막하기만 했던 삶에서 차곡차곡 쌓이고 이자까지 붙는 이 통장이야말로 일화의 꿈이 됐다.

덤덤한 척, 씩씩한 척했지만 사실은 두렵고 기댈 곳 없어 외로웠던 선영은 고향 오빠이자 이웃인 봉황당 최무성과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진주는 말수가 늘었고, TV를 보는 대신 아빠에게 고민 상담을 한다.

생활이 나아진 탓에 목욕탕 청소 대신 요리 학원에 다닐 수 있게 됐고 가족들에게 진짜 맛있는 밥을 차려줄 수 있게 됐다.

1994년으로 간 '응답하라 1998'은 훌쩍 커 성인이 된 아이들과 아이들을 품 안에서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 부모들의 모습을 그렸다.

오랜만에 집에 와 저녁도 안 먹고 다시 집을 나서는 정환을 보며 "품 안에 떠난 자식이라더니…"라며 아쉬워하는 미란의 모습은 자식을 위해 살았지만 결국은 자식을 떠나보내야 하는 부모의 운명을 그려냈다.

(서울연합뉴스) 조민정 기자 chomj@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