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의 미덕은 색다름이다. 아시아를 포함한 제3국 영화들은 철저하게 오락적인 할리우드물에 길들여진 관객들에게 인간 사회의 다양한 모습과 삶의 본질을 돌아볼 수 있게 한다. 2000년 제5회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된 인도 영화 '레슬러'도 그렇다.

내용은 단순하다. 니마이와 발라람은 레슬링으로 무료함을 달래는 철도 건널목지기.어느날 니마이가 발라람의 처 우타라에게 눈독을 들이자 둘은 싸우느라 테러로 죽게 된 목사를 구해달라는 우타라의 애원을 외면한다. 절망한 우타라는 이웃 난쟁이마을로 가려 하지만 그마저 뜻대로 안된다.

경제학 교수 출신인 부다뎁 다스굽타 감독은 '민요와 전통춤의 원용'이라는 인도영화의 문법을 고스란히 지켜내는 가운데 세상 어디에서나 있을 수 있는 사회적 무관심과 편견에 따른 비극 및 소수나 약자에 대한 폭력을 고발한다. 민요의 철학적인 가사와 묘한 음률 탓이었을까,영화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독특한 영상 세계가 공감을 얻어내는 걸까. 영국 · 인도의 합작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감독 대니 보일)가 올해 아카데미상에서 8관왕이 됐다. 인도의 빈민가 청년이 퀴즈쇼를 통해 백만장자가 된다는 내용이라는데 주연배우는 물론 아역 배우들까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고 한다.

가난하고 비참한 인도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 작품의 수상을 놓고 논란은 많다. 그러나 인도 민요의 뮤지컬적 구성을 앞세운 영화는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과 함께 인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게 틀림없다. 안그래도 인도는 연간 1200여편이 제작되는 세계 최대의 영화 제작국이다.

막강한 자국 시장과 독창성을 바탕으로 세계의 문을 두드리는 게 인도뿐이랴.일본은 극영화는 몰라도 애니메이션으로 꾸준히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번에도 '작은 사각의 집'으로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받았다. 그에 비해 한국 영화는 존재감조차 없다는 마당이다.

한국영화의 한계를 뛰어넘자면 해외 진출만이 살길이라고 한다. 해외로 나가자면 전열을 완전히 재정비해야 한다. 한국의 문화인류학적 특성을 포함하되 인간 본연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세계인의 보편적 감성에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 할리우드 짝퉁으론 결코 영화강국이 될 수 없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