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말기인 1978년. 그 시절 대부분 학교가 그랬듯이 고등학교는 청춘을 저당잡힌 수용소였다. 혈기방장한 남고생들은 `빨간 책'으로 불리는 도색잡지를 돌려보며 욕정을 달래거나 라디오 심야방송에 엽서를 보내 연정을 불태웠다. 그리고 욕망의 탈출구 저편에 `우리의 우상' 리샤오룽(李小龍)이 우뚝 서 있었다. 오는 16일 개봉될 `말죽거리 잔혹사'(제작 싸이더스)는 78년과 79년 서울 강남의 신설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이덕화와 임예진이 청춘 스타로 활약하던시절이지만 당시 고교생들의 학교 안팎 생활은 `고교 얄개'처럼 유쾌하지도 않았고`진짜 진짜 잊지마'처럼 로맨틱하지도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된 현수(권상우)는 땅값이 오를 것을 기대하고 서울 강남으로이사온 어머니 때문에 정문고로 전학온다. 이곳은 교사들의 폭력과 학생들간의 세력다툼으로 악명 높은 문제학교. 첫날부터 버스에서 상급생에게 칼라(교복 깃 안에 덧대는 장식)를 빼앗기고 교문을 들어서다가 복장 검사에 걸려 야구 배트로 두들겨맞는가 하면 1년 꿇었다는 급우에게 상납을 요구받는다. 앞으로 지낼 날들이 막막하지만 새로운 희망이 자리잡는다. 교내 최고의 주먹인우식(이정진)의 권유로 농구 경기에 끼게 된 현수는 팀을 승리로 이끌고 우식과 나이트클럽까지 함께 갔다가 둘도 없는 사이가 된다. 그의 등하교길을 즐겁게 해준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인근 여고의 3년생 은주(한가인). 올리비아 허시를 꼭 닮은 은주에게 마음을 빼앗긴 현수는 버스 안에서 불량배에게 시달리는 그를 도와주다가 가까워진다. 그러나 현수는 수줍음과 설렘 때문에 좀처럼 은주에게 다가서지 못하는데 우식은 `터프 가이'다운 방식으로 단번에 은주 마음을 사로잡는다. 우정과 연정 사이에서 고민하던 현수는 우식이 선도부 종훈(이종혁)과 맞대결을벌였다가 패한 뒤 은주와 함께 가출하자 삶의 의욕을 잃고 리샤오룽의 쌍절곤에 모든 희망을 건다. 시인 감독 유하는 40대 관객이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학원 풍경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옮겨놓았다. 학교의 폭군인 교련 교사, 도색잡지를 파는 급우, 학교에서 특권층으로 대우 받는 삼성장군 아들 등은 어느 학교에서나 만날 수 있는 인물이었고선도부원(규율부원)이 늘어선 교문, 나이트 클럽의 디스코 춤, 라디오 심야방송의엽서, 떡볶이집의 DJ 박스, 기타를 둘러메고 타는 경춘선 열차 등은 시대의 단면을드러내주는 삽화였다. 93년 `바람 부는 날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로 호된 신고식을 치렀던 유하 감독은 2002년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보란듯이 복귀에 성공한 뒤 사춘기 시절의 자서전과도 같은 이 영화로 완전한 명예 회복을 이뤘다. 콧속이 알싸해지고 가슴이 뻐근해지면서도 입가에 엷은 미소가 피어나게 만드는 추억담을 이렇게 완벽하게 재현해내기란 쉽지 않다. 미끈한 외모와 높은 인기에 비해 연기력이 떨어진다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던권상우도 연기에 물이 올랐고 주변 인물들도 절묘한 캐스팅과 빼어난 호연으로 힘을보탰다. 이종환, 박원웅, 차인태 등 남성 DJ들이 주름잡던 라디오 심야시간대에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남성 청취자들의 귓가를 간지럽혀주던 서금옥도 특별출연했다. 상영시간 116분. 15세 이상 관람가.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heeyo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