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적이 끊기고 차량 통행도 뜸한 18일 자정.


서울 남산 기슭의 서울시 건설안전관리본부 주차장에는 차량 100여대가 속속 모여들고있었다. 이들은 조 편성을 마치고 `작전 명령'을 하달받은 뒤 예행연습까지 실시했다.


이들의 임무는 영화 「오아시스」(제작 이스트필름)를 서울 도심의 교통 대동맥인 청계고가도로에서 촬영하는 것. 이미 수십차례 `도상작전'을 거듭했지만 `D데이'가 결정되지 않아 결행을 미루다가 19일 새벽 서울시와 서울지방경찰청의 협조 아래`도로 점거'에 나서게 됐다.


발전차와 촬영장비 탑재차를 비롯한 100여대의 차량 행렬은 새벽 2시 40분이 넘어서자 비상등을 켜고 삼일고가도로를 통해 청계고가도로로 들어섰다.


경찰이 외곽 방향으로 진입하는 차량을 모두 막아주었지만 작전을 총지휘하는이창동 감독의 입가에는 비장함이 서렸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도로 점거 승인을 얻어낸데다가 시간이 제한돼 있어 한치의 빈틈없이 작전을 치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오아시스」는 교도소에서 출소한 뒤 카센터에서 일하는 사회부적응자 종두(설경구)와 순수한 영혼을 지닌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 공주(문소리)의 애틋한 사랑을그린 멜로물.


이날 촬영 장면은 데이트길에 나선 종두가 청계고가도로의 차량 흐름이 정체되자 승용차에서 내려 공주를 안아들고 카라디오의 음악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대목이다. 모두 7분 가량의 6컷으로 해뜨기 직전과 직후에 두 차례씩 찍었다.


청계천 6가와 7가 사이의 고가도로를 꽉 메운 차량 행렬에는 택시, 승합차, 대형ㆍ중형ㆍ소형 승용차 등이 골고루 섞여 있었고 빛깔도 배색을 고려해 배치해놓았다.


카메라가 향하는 방향마다 스태프나 교통경찰 등의 모습이 비치지 않아야 하기때문에 흡사 공습경보 상황처럼 감독의 목소리가 떨어질 때마다 일제히 차량 옆으로숨는 장면이 거듭됐다. 엑스트라로 등장하는 운전자들도 창문을 열고 내다보거나 경적을 누르는 동작 등을 잘 맞추지 못해 스태프들의 눈총을 받기 일쑤였다.


평소 나지막한 소리로 지시를 내리던 이창동 감독은 처음으로 메가폰을 들고 고함을 질러 금세 목소리가 쉬어버렸다.


가장 진땀을 흘린 이는 겨울 파카를 껴입은 채 문소리를 안고 춤을 추어야 하는설경구. 운동으로 단련된 몸이지만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그를 바라보는 문소리는미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 씨바 좋다!/마마, 내리시옵소서. 내려보시옵소서. 괜찮사옵니다./신나지? 응, 신나지?/마마, 여기가 청계고가도로 위랍니다. 우리가 언제 이 위에 서 있어보겠사옵니까? 안 그렇습니까? 와아아아-"


시나리오상에는 종두가 기분이 좋아서 외치는 함성이지만 슬레이트(일명 딱다기)의 테이크 숫자가 높아짐에 따라 힘에 부쳐 내뱉는 비명으로 점차 바뀌어간다.


오전 6시 주위가 환해지자 이창동 감독은 아쉬움과 후련함이 뒤엉킨 목소리로촬영 종료를 선언했다. 만족스런 장면은 나오지 않았지만 마침내 해냈다는 안도감에서 입가에 살짝 미소가 비쳤다.


"평소 1컷 찍을 때 5∼6시간을 허비하는데 이번에는 1시간 만에 6컷을 찍어야하기 때문에 퀄리티는 포기해야 했지요. 도둑촬영을 일삼아오다가 이렇게 당당히 협조를 얻어 촬영하게 됐으니 그래도 많이 나아진 셈이지요. 이제 시민들도 마라톤이나 종교행사, 시위처럼 영화촬영을 우리 문화의 일부로 받아들여 `고통 분담'에 동참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청계고가도로에서 정식으로 영화촬영이 이뤄진 것은 69년 완공 이후 처음 있는일. 당초 4월 5일 오후 찍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200대 엑스트라 차량까지 모집했으나 교통 혼잡 등을 우려한 서울시경의 반대로 미뤄져오다가 촬영 이틀 전 가까스로승인이 떨어졌다.


이날 촬영에는 엑스트라 공모에 참여한 일반 시민, 스태프의 친지, `박사모(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 등이 자원봉사에나섰다.


「오아시스」는 22일 태국에서 아기코끼리가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을 촬영한 뒤후반작업을 거쳐 8월 9일 개봉될 예정이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기자 heeyo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