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자가 있다. 복싱 라운드걸 출신으로 밤낮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는 여자 수진(전도연). 투견장 건달(정재영)과 동거를 하며 걸핏하면 욕을 먹고 간혹 두들겨 맞기도 한다. 언젠가는 음반을 내고 가수로 데뷔하는게 그녀의 꿈. 시간 날때마다 TV 쇼프로를 보며 내공을 다지고 있다. 또 다른 여자는 왕년에 금고털이로 한가닥했던 경선(이혜영). 도망간 남편이 진 빚을 갚기 위해 택시운전을 하는 중년여자다. 술취한 남자 손님들의 성희롱과 빚을 받아내려고 따라 붙는 퇴물사채업자의 등쌀에 늘 죽을 맛이다. 그녀의 희망은 어딘가에 있을 딸을 찾아 함께 사는 것. 차 사고를 계기로 우연히 알게 된 두 여자는 거액의 투견장 판돈이 든 돈가방을 훔쳐 달아날 모의를 한다. 하지만 한마디로 '개판'인 그 바닥의 살기등등한 인생들을 따돌리기가 쉽지 않다. 제2, 제3의 모의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돈가방 쟁탈전이 벌어진다. 류승완 감독의 신작 '피도 눈물도 없이'는 뒷골목 인생들의 흉포한 세계를 직설적으로 그린 영화다. 쌍시옷이 난무하는 욕설, 잔혹한 싸움과 배신이 숨가쁘게 이어지면서 영화는 비정한 세계의 핵심을 향해 거침없이 치고 들어간다. 류 감독은 이 영화를 전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 비해 한층 매끈하게 다듬어냈다. 전작에서 문득문득 보이던 치기를 털어내고 번뜩이는 재기를 그 자리에 채워넣었다. 여러 갈래의 이야기가 결국엔 하나로 모이는 치밀한 구성도 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기여한다. 무엇보다 빛나는 건 배우들의 연기다. 특히 7년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이혜영과 그동안 주로 코믹한 역을 맡았던 정재영의 혼신의 연기가 돋보인다. 이혜영은 특유의 뇌쇄적인 카리스마를 안으로 숨기면서 삶에 지친 전직 여건달의 이미지를 뚜렷하게 각인시킨다. 어떤 면에선 몸을 던지는 연기보다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지 않는게 더 어렵다. 정재영은 잔혹하기만 하고 자존심은 없는, 게다가 깡패들의 상징인 의리조차도 없는 막장인생을 실감나게 그려냈다. 전도연 역시 철없으면서도 매서운 구석이 있는 여건달역을 깔끔하게 소화한다. 한물간 사채업자 백일섭과 그의 덜떨어진 똘마니인 김영인 백찬기, 얼치기 건달 류승범 등 조연 배우들이 펼치는 코믹연기도 영화의 섬뜩하고 칙칙한 분위기에 생기를 부여한다. 아쉬운 부분도 있다. 악에 받친 인생들이 벌이는 한 바탕 활극이 끝나고 나면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물어 죽이지 않으면 물려 죽는 개싸움을 인생의 축소판으로 빗댄 것인지, 아니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얼핏 보이듯 '착하게 살자'는 고답적 주제를 장난처럼 내세우는 것인지 모호하다. 영화를 다 보고나면 '악(惡)의 끝을 향해 갈 데까지 가보자'는 감독의 삐딱한 심리에 말려들어간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온다. 류 감독은 시사회가 끝난후 "어떤 영화인지 설명해 달라"는 질문에 "투견장에서 거액의 현금을 빼돌리는 내용을 담은 영화다. 여자가 남자보다 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물론 육체적인 면에선 아니지만... 나도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이 영화에서 억지로 어떤 메시지를 찾지 말고, 우리사회 어딘가에 있을 수 있는 막장 인생들의 비정한 세계를 하나의 '풍경'처럼 봐달라는 주문인 것 같다. 3월1일 개봉. 18세 이상. 이정환 기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