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歸鄕). 말만 떠올려도 가슴이 뭉클해지기 마련이다. 특히 명절 때 고향가는 길은 귀성 차량들로 북새통이 돼 '고생길'로 통한다. 그럼에도 너나 없이 고향행 대열에 합류하는 이유는 뭘까. 무엇이 그토록 애타게 우리를 부르는 걸까. 작가 김을(金乙.48)씨의 고향은 전남 고흥군 고흥읍 옥하리 265번지이다. 그는 고향을 찾을 때마다 묘한 감정의 혼란에 빠지곤 했다. 형언하기 힘든 아릿함이 문득 문득 가슴을 쳤다. 단순한 상념을 넘는 그 어떤 것이었으나 정체를 알아차리기는 무척 어려웠다. 그게 뭘까. 이런 의문은 선산 성묘길에 더욱 또렷하게 불거졌다. 조상과 후손의 시간을 초월한 만남. 그러나 효의식이나 인간의 도리로는 풀 길 없는 의문부호들. 그것은 '내가 왜 여기 있는가'였다. '나를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였다. 이달 6일부터 내달 3일까지 서울 관훈동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에서 계속되는 개인전은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이다. 전시제목은 '옥하리 265번지'로, 고향 주소에서 따왔다. 이곳은 작가가 태어나고 성장한 종가이다. 김씨가 그토록 찾아온 해답은 다름아닌 '피'였다. 피는 시간과 공간의 차이도 바꿔놓을 수 없는 원형질 같은 것. 그 흐름은 면면히 흘러 하나의 가족사를 구성했다. 나아가 민족과 인간의 역사이기도 했다. 수많은 사연들을 얽어매는 사랑과 슬픔의 밑바탕이었던 것이다. 작가는 이를 '혈류(血流)'라고 이름붙였다. 출품작은 크게 보아 두 점에 불과하다. 선산과 종가, 논밭이 펼쳐진 피의 풍경이 그 하나요, 6대의 가족사를 엮은 인물들의 그림이 또다른 하나이다. 특히 인물도는 31명의 그림이 하나의 덩어리를 이뤄 이채롭다. 각각의 인물화를 포개어 전시함으로 써 관람객이 한 점 한 점을 들춰보며 '피의 흐름'에 빠져들게 한 것이다. 대안공간인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은 일체의 장식없이 건물 뼈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는 삶의 근원을 떠올리게 해 김씨의 작품 전시장으로는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든다. 풍경화와 인물도는 텅 빈 공간의 구석에 각기 놓여 묘한 교감을 연출한다. 31점의 인물도 역시 상호소통하며 희로애락으로 뒤범벅된 가족사를 들려준다. 작가는 이른바 '혈류도' 작업으로 자신을 찾았다는 느낌을 얻었다고 술회한다. 인간 운명은 피와 그 흐름으로 시작하되 삶의 절반도 그에 의해 지배받는다는 것. 이는 자신과 가족의 의식과 감정에 내면화해 있었고, 한국인의 삶과 문화로 오솔길처럼 이어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감상자가 그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자신의 삶을 작가의 세계에 치환한 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된다. 각자의 풍경화와 가족도를 그려낸 다음 '내가 왜 그곳에 있는가' '나를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조용히 던져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미를 민족과 인간으로 확장해보는 것이다. ☎ 733-0440.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id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