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흑수선"은 전통적 양식의 역사스릴러다. 배창호 감독이 "러브스토리""정" 등의 작가주의적 경향에서 벗어나 "최고흥행사"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만든 야심작이다. 안성기 이미연 이정재 등 화려한 캐스팅,속도감있는 편집과 액션 등 영화적 표현과 장식들이 풍성하다. 최근의 가벼운 액션코미디 흐름과는 달리 무겁고 진지한 주제를 담았다. 한국전쟁과 50년간의 시차를 넘나드는 사랑 등 역사와 멜로적 요소가 강한 복합장르로 제작됐다. "흑수선"은 의문의 연쇄살인이 한국전쟁 당시 거제포로수용소 탈주사건에 닿아 있다는 사실을 토대로 그 비극에 희생된 사람들 얘기를 그려낸다. 거제포로수용소는 한국전쟁 당시 약 17만명의 공산당원들이 친공과 반공으로 갈려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던 곳이다. 영화는 한 노인의 시체가 강 위로 떠오르고 그가 마약중독자 양달수(이기영)임이 밝혀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오형사(이정재)는 현장에서 발견된 "대량(大良)"이라고 인쇄된 명함 조각과 일제 금속 안경테 조각을 단서로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간다. 1952년 거제도 포로수용소 탈출 사건 당시 극우 경찰 양달수,남로당원 오지혜(이미연),그녀의 연인이자 장기수였던 황석(안성기),빨치산의 우두머리 한동주(정준호) 등의 관계가 하나씩 베일을 벗는다. 범인이 밝혀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반전이 일어난다. 흑수선은 극중 오지혜의 암호명. "범인추적"외에 연인들의 평생을 바친 사랑과 50년만의 복수극 등 짙은 비애감이 드라마를 이끄는 동력이다. 3백여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된 거제도 포로수용소 탈출 사건 장면은 모노톤으로 웅장하고도 비장감있게 재현됐다. 고강도 액션들도 도입됐다. 일본 미야자키현에서 촬영된 데루하 흔들다리위의 총격전과 오토바이추격신,나이트클럽에서의 대결 등이 그것. 킬러와 오형사의 쫓고 쫓기는 대나무숲 장면 등에선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불안감이 적절하게 표현됐다. 거제도와 일본 미야자키현,화엄사,해남 두륜산 등지에서의 로케이션 촬영이 영화를 더 풍성하게 한다. 오형사의 아웃사이더적인 캐릭터,그가 사는 실내의 심플한 인테리어 등은 사극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드라마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임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다. 그러나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볼때 결함들도 곳곳에서 드러난다. 배우들의 대사는 관습적이며 이미연의 분장도 50년의 시차를 극복하지 못했다. 범인이 서울역 청사에서 떨어지는 장면도 인형을 활용한 촬영임이 금방 눈에 띈다. 디테일의 부족이 작품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느낌이다. 배감독은 이에 대해 "극사실주의가 아니라 인상주의 화가처럼 느낌을 살리는데 주력했다"고 설명했다. 관객들이 배감독의 의중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흥행의 관건이 될 전망이다. 16일 개봉.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