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이거 내 얘기잖아" 「봄날은 간다」의 시사회가 끝난 뒤 사람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요즘은 판타지로 포장된 사랑 이야기보다 일상의 소소한 에피소드를 다룬 '현실밀착형' 멜로 영화들이 환영받는 분위기.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가 그랬고,「하루」「선물」「불후의 명작」등도 비슷한 범주에 있는 작품들이다. 헌데 이런 영화들은 한 가지 오류에 빠지기 쉬운데, 일상에 관한 지나친 강박관념 때문에 단순하게 일상의 에피소드만 나열하기가 쉽다는 것. 영화를 보는 순간에는 '내 얘기야'라고 맞장구치지만 극장문을 나서서까지 여운과 감흥을 느낄 수 없다. 허진호 감독의 신작「봄날…」은 좀 다르다. 남녀의 자연스러운 연애 감정을 정말 그럴듯 하게, 유머와 위트를 섞어 풀어내면서도 사랑과 인생에 관한 깊은 통찰력도 빼놓지 않는다. 다가설 듯 말듯 망설이는 사랑을 다뤘던「8월의 크리스마스」와는 달리 감독은 이번엔 불같은 사랑을 택했다. 격정적인 만큼 후유증도 큰 사랑이다. 이혼 경력이 있는 지방 라디오 방송국 PD 은수(이영애)와 26살의 녹음기사 상우(유지태)가 주인공. 상우는 자연의 소리를 채집해 들려주는 프로그램의 아나운서 은수와 함께 일을 하게 된다. 두 사람은 소리채집을 위해 대나무숲, 강가 등을 여행하면서 가까워지고, 은수의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보낸 상우는 불 같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결혼'이란 말 앞에서 의외로 쉽게 삐걱댄다. '죽으면 무덤에 함께 묻힐 수 있느냐'고 묻던 은수는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상우가 갑자기 부담스럽게 느껴지고, 이 후부터 그녀의 태도는 급변한다. "헤어져"라고 야멸찬 말을 내뱉는 은수에게 상우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묻는다. 다른 한 축에는 집 나간 남편을 매일같이 기다리는 치매 걸린 상우의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는 자신에게 잘 대해줬던 젊은 시절 남편의 모습만 기억한다. 실연의 상처에 허덕이던 상우는 마지막 순간 "여자와 버스는 떠난 다음 잡지 않는 거란다"라는 말을 남기고 간 할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비로소 자신을 되찾는다. 어린 상우의 불같은 사랑과 할머니의 남편의 사랑은 묘한 대비를 이룬다. 평생 잊지못할 것 같던 사랑의 아픔도 긴 인생에서 보면 작은 흠집에 불과하다는 것.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은 누구나 가장 행복했고 아름다운 순간인 인생의 '봄날'을 기억하고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고, 인생이 아니냐고 감독은 말한다. 이영애와 유지태의 실감나는 연기가 없었다면 그저 그런 작품이 될 수도 있었다. 쉽게 사랑에 빠졌다가도 또 쉽게 그 사랑을 잊을 수 있는, 복합적인 성격의 여주인공 '은수'역을 맡은 이영애는 그동안 작품 가운데 가장 물오른 연기를 보여준다. 밑에서 찍은 대나무 숲과 고요한 산사의 풍경 등 한 컷 한 컷 공들여찍은 미려한 영상과 정선 아우라지 물소리, 보리밭 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도 감상할 수 있다. (서울=연합뉴스) 조재영기자 fusionjc@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