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관과 재소자의 관계는 대개 앙숙이다.

교도관이란 엄밀히 말해서 죄수 감시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시대엔 간수 또는 형리라는 말로 교도행정의 최일선 공무원을 대접하지 않았다.

그런 풍토였고 보면 교도소안에서 감시자와 피감시자가 끈끈한 인연을 맺는 픽션이 등장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린마일"은 1930년대를 살았던 사형수와 간수장이 펼치는 옥중 우정담이다.

무대는 미국교도소.

시대배경으로 봐선 형무소-간수-죄수라는 용어가 어울린다.

좀처럼 화합하기 어려운 상극의 두 주인공을 밀착시킨 이야기 설정은 역시 미국적이다.

감동 요소가 적건 많건 간에 이 영화는 신분의 벽을 뛰어 넘은 인간관계의 모델을 또 하나 보여 줬다는 점에서 인류평화구현에 한몫했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고 불만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사형수가 하필이면 흑인일 게 뭐란 말인가.

그에게 인간애를 베푸는 교도관이 백인이라는 것도 문제다.

그 반대였더라면 더 감동적이었을 것을...

60~70년전 미국엔 흑인교도관이 없었는지 모르지만 상처입은 영혼이,또 그것을 위로받아야 할 대상이 꼭 흑인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노예의 후예에 대한 온정주의와 그들에게 무자비했던 백인의 속죄주의가 합성된 해묵은 도식이 새롭게 등장한 것같은 느낌이다.

그래도 흑인 사형수의 가엾은 모습은 연민을 일으키는 데 부족함이 없다.

원시미를 발산하는 우람한 체구에 겁먹은 듯한 눈망울이 억울한 희생자의 좌절과 무력감을 그대로 보여준다.

전기의자에 앉아 죽음을 맞는 표정엔 그의 말대로 "비에 젖은 참새"같은 찌들린 삶의 비애가 고스란히 스며있다.

삶에 지쳐 빨리 죽고싶다는 최후진술에선 더욱 처연해진다.

그런 사형수의 순진무구한 모습을 보인 마이클 클락 덩커의 연기는 금년 오스카상 심사위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린마일은 감방에서 사형장으로 가는 복도의 별칭이다.

영화사 선전문구를 빌면 "지상에서 영원으로 가는 길"인 것이다.

좀 우울한 이야기를 하자면 사람이 일단 태어나면 그 즉시 그린마일의 길로 들어선다고 할 수 있다.

조금은 인생을 되돌아보게 하는 이런 성인적 요소가 한국 영화에선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쉽다.

"철도원""아메리칸 뷰티"등 최근 잇달아 선보인 외국의 화제작에서 관조의 세계를 체험한 중장년층의 마음이 더욱 그렇다.

젊은 세대를 겨냥한 작품만 쏟아내는 우리 제작진의 편식 현상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편집위원 jsrim@ k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