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졸업 후 생활전선 뛰어들어…직업훈련원서 장식미술 훈련 매진
1983년 국제기능올림픽서 현대중공업 첫 금메달…"후진양성,조선업 발전에 보답"
[산업수도 명장] '중졸 기능공에서 선박 인테리어 거장으로' 조해현 대표
[※ 편집자 주 = 울산은 명실상부 대한민국 '산업 수도'입니다.

자동차·조선·석유화학 업종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기술 명장과 장인들이 경제 발전을 이끌어 왔습니다.

이제 4차 산업 시대라고 합니다.

현장이 자동화하고 로봇으로 대체된다고 하지만,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연합뉴스는 그동안 기술 개발과 경제 발전을 위해 묵묵히 산업현장을 지켜온 울산 지역 명장과 장인들을 재조명하는 기사를 매월 첫째 월요일에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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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의 선실은 망망대해에서 의식주를 모두 해결해야 하는 선원들에게 어쩌면 집보다 더 중요한 공간일 수도 있습니다.

좁은 공간에서나마 안락하게 지내고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으려면 인테리어가 무엇보다 이뤄져야겠죠."
현대중공업 사내 협력업체인 해인기업의 조해현(60) 대표는 선실 인테리어 설계·시공 분야 명장이다.

침실, 화장실, 식당부터 편의시설로 갖춰지는 수영장이나 사우나까지.
모든 선박 내부 공간의 의장·전장·도장 시공을 맡아 기능적 효용뿐 아니라 디자인 부문 가치까지 높이는 일을 책임진다.

이 분야 기술력을 인정받은 조 대표는 2020년에 울산광역시 명장과 고용노동부 기능한국인에 잇따라 선정됐다.

현대중공업 사원과 부서장을 거쳐 사내 협력사 대표가 된 그의 이력만 놓고 보면 '탄탄대로'라는 말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기능인을 향한 여정의 시작은 오히려 좁고 험한 가시밭길이었다.

충북 청주 출신인 조 대표는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으로 중학교 졸업 후 학업을 포기하고, 생계유지를 위해 상경해야 했다.

작은 몸으로 무거운 가구를 배달하는 일을 시작했다가, 가구점이 문을 닫으면서는 띠동갑 큰형이 일하는 슈퍼마켓에서 일을 도왔다.

눈코 뜰 새 없는 생활에서도 '스스로 살길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놓을 수는 없었다.

[산업수도 명장] '중졸 기능공에서 선박 인테리어 거장으로' 조해현 대표
그러던 차에 신문에서 직업훈련원 모집공고를 접했고, '기술을 배우겠다'는 의지로 공예공과 야간반에 지원했다.

1년 6개월간 주경야독 생활 끝에 해당 과정을 수료했고, 두각을 보인 조 대표는 장식미술 과정 참여도 권유받았다.

한발 더 나아갈 기회라고 여긴 그는 학업에 전념하고자 슈퍼마켓 일까지 그만두었다.

밤낮으로 훈련을 거듭한 끝에 1981년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금상을 받았고, 그 성과를 인정받아 현대중공업에 입사했다.

"장식미술을 배우던 당시 선배가 없어 기술을 익히기가 쉽지 않았는데, 당시 기능 국가대표 선수들이 제가 있는 직업훈련원에서 합숙 훈련을 하는 기회가 생겼어요.

그때 훈련 과정을 참관하며 어깨너머로 배우고, 어려운 점은 물어보기도 하면서 실력이 많이 늘었죠.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기능인으로서 성취에 갈증이 컸던 조 대표는 입사 후에도 기능 국가대표가 되고자 훈련을 거듭했다.

회사의 지원 아래 서울과 울산을 오가며 훈련에 매진했고, 결국 1983년 국가대표로 선발돼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열린 '제27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장식미술 분야 금메달을 따냈다.

당시는 정부도 기능올림픽에 대한 관심이 높은 시기여서, 조 대표는 김포공항에서 세종문화회관까지 카퍼레이드하며 시민들의 성대한 환영을 받는 경험까지 했다.

특히 현대중공업은 지금까지 기능올림픽에서 해마다 우승자를 배출했는데, 그 출발점이 바로 조 대표의 금메달이다.

후배 기능인과 회사의 영광에 물꼬를 튼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조 대표의 당시 우승은 큰 의미를 지닌다.

[산업수도 명장] '중졸 기능공에서 선박 인테리어 거장으로' 조해현 대표
조 대표는 현대중공업 기술교육원에서 3년간 후배 양성에 힘쓰다가, 1987년 선실설계부에서 본격적으로 실무를 시작했다.

업무를 거듭하며 선실 의장설계 능력을 갖추게 됐고, 선박 인테리어 전문가의 길을 선택한 후에는 선실생산부에 자원했다.

이때 1천500명이 승선하는 규모의 여객·화물 겸용 운반선(RO-PAX)을 건조하면서 얻은 성취감은 기능인으로서 살아가는 데 밑거름이 됐다.

"당시 출퇴근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일에 빠졌습니다.

문제를 직접 확인하고 해결하려고 궂은 날씨에 흔들리는 선박 안에서 생활하며 작업하기도 했어요.

이후 수백 척의 선박 인테리어를 맡으면서 성과를 인정받았고, 저는 선실생산부 부서장이 됐어요.

중졸로 입사한 기능공이 세계 최고 조선소의 한 부서를 책임지게 된 것이죠. 스펙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현대중공업의 문화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
배움에 대한 목마름이 컸던 조 대표는 회사에 다니면서도 특유의 성실함으로 주경야독을 이어간 끝에 고등학교, 전문대, 종합대학을 차례로 졸업했다.

조 대표는 평소 사업체를 운영해보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다.

때마침 현대중공업이 작업 물량 증가로 사내 협력사를 모집했고, 또 한 번 도전을 선택한 그는 2012년 해인기업을 설립했다.

선박 선실 인테리어 공사를 전문으로 하는 이 회사는 현재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의 협력사로, 직원이 200명이 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산업수도 명장] '중졸 기능공에서 선박 인테리어 거장으로' 조해현 대표
오늘날 자리에 있기까지 주변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조 대표는, 자신도 후배 기능인 육성과 조선업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다.

2001∼2011년 전국기능경기대회 장식미술 심사장과 장식미술 국제심사위원을 지냈고, 2017년부터 현재까지 울산시 기능경기위원회 기술위원장도 맡고 있다.

또 지난해 창립한 현대중공업 사내협력사협동조합 초대 이사장을 맡아, 협력사 직원들의 후생 복지와 환경 개선도 챙기고 있다.

기능인으로서 성취감과 자부심이 충만한 그에게 아쉬운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역시 후배 기능인들에 대해 애정이 가득 담긴 대답이 돌아왔다.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가 산업적으로 우뚝 서는 방법은 오직 높은 기술력을 갖추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조선업만 보더라도 현재 추세라면 1등을 빼앗기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많은 젊은 인력이 기능인으로 활동하면서 성취를 이루면, 제조업도 다시 활력을 가질 것입니다.

저도 현장에서 노력하겠습니다.

정부도 기술 강국 대한민국을 위해 기능인을 우대하는 정책을 지속해서 펼쳐주기를 바랍니다.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