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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덴이 없었다면 TSMC 유치는 어려웠을 것”

최근 일본의 닛케이 비즈니스는 TSMC가 일본에 투자한다는 내용을 보도하면서 재무성 관계자의 말을 이같이 인용했다. 이비덴은 반도체 패키징 기판 세계1위 업체다. TSMC가 이비덴을 비롯한 기업들과 패키징 분야에서 협업을 하기 위해 일본을 찾았다는 의미다.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미세화 공정에 이어 반도체 패키징 공정에서 세계적인 경쟁이 격화되고 있다. 기업들은 차세대 패키징 기술에 투자를 늘리고, 다른 업체들과 합종연횡도 마다하지 않는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앞으로 10년 뒤에는 패키징 기술력에 따라 업계 순위가 정해질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2016년의 굴욕’ 가져온 패키징

반도체 후공정 중 하나인 패키징은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전공정에 비해 중요도가 낮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도체를 외부로부터 보호하고, 기판에 연결하는 중간다리를 놔주는 역할에 그쳤다. 반전이 일어난 건 2016년이다. 삼성전자가 패키징때문에 애플의 어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파운드리 수주를 전량 TSMC에 뺏긴 것. 당시 TSMC는 FO-WLP(팬아웃 웨이퍼레벨 패키지) 기술을 개발해 칩 두께는 20% 줄이고, 속도는 20% 높이는 데 성공했다.

TSMC는 패키징 전문 업체들과 견줘도 공정 처리 규모만 세계 3~4위에 들 정도로 앞선 기업이다. 그런 업체가 일본과 손을 잡는 이유는 패키징이 갈수록 복잡 다단해지기 때문이다. 사용처와 용도에 따라 마치 낸드플래시를 쌓듯 칩을 적층하는 기술(TSV), 여러 칩을 조합해 하나의 패키지로 묶는 기술(SiP) 등이 속속 등장했다. 특히 전장과 첨단 서버용 반도체는 패키지 완제품의 면적이 넓기 때문에 크기를 줄이는 데 특화된 FO-WLP로는 제조에 한계가 있다.

반도체 업계는 TSMC가 이비덴의 주력 분야인 FC-BGA(플립칩 볼그레이드어레이)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칩을 선이 아닌 면 단위로 기판에 연결하는 기술로, 대면적 패키징에 유리하다. 이비덴과 협업하면 현재 세계적인 공급부족 상태인 FC-BGA패키징에서 우선공급을 기대할 수 있다. 일본은 도요타, 혼다 등의 전장용 반도체 수요가 큰 지역이기도 하다. TSMC는 200억엔(약 2100억원)을 투자해 후공정 분야 연구개발(R&D) 센터를 설립하고, 도쿄대에 R&D센터 건립도 추진 중이다.

역전 노리는 삼성·투자 퍼붓는 미국

삼성전자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계열사인 삼성전기는 TSMC의 FO-WLP에 대항하는 기술인 PLP(패널레벨패키지) 개발에 착수해 2018년 양산에 성공했다. 수율은 95%를 넘었다. 반도체 패키지 기판을 쓰지 않고 메인보드에 곧장 칩을 연결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이 사업부를 삼성전자가 2019년 넘겨받아 다양한 수요처에 활용할 수 있도록 강화해왔다. 삼성전자는 로직과 S램을 수직 적층한 ‘엑스큐브’, 로직 칩과 4개의 HBM(하이 밴드위드 메모리) 칩을 하나의 패키지로 구현한 ‘아이큐브4’ 등 신기술도 속속 내놓고 있다.

이비덴의 경쟁사인 삼성전기도 패키징 분야에 힘을 주고 있다. 특히 그동안 주력이었던 모바일·PC용 반도체 패키지 기판 외에 서버용 시장에도 뛰어들 방침이다. 라인 증설도 추진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올해 삼성전기의 반도체 패키지 기판 매출이 전년대비 19% 증가한 1조4400억원으로, 그 중 5300억원 가량이 FC-BGA에서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 관련 영업이익률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미국 기업들은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맞대응 중이다. 인텔은 35억달러(3조9000억원)를 들여 미국 뉴멕시코 주 리오랜초에 반도체 패키징 시설을 짓고 있다. 이 라인은 내년 말부터 가동에 들어간다. 애플도 최근 M1 프로세서와 메모리를 함께 패키징하는 기술을 공개했다. 미국 정부는 지난 5월 105억달러(11조9000억 원)를 패키징 등의 R&D 지원 예산으로 편성했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과 교수는 “정부에서 청주·충주에 패키징 전문 단지를 조성할 예정이지만 해외와 비교하면 지원수준이 낮다”며 “패키징을 반도체 등 전략산업 특별법에 포함시켜 R&D를 촉진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수빈 기자 ls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