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보면 공식처럼 나오는 장면이 있다. 상류층의 전유물처럼 등장하는 와인. 멋진 색과 분위기로 와인의 고급 술 이미지를 부각한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와인잔이다. 와인잔의 긴 스템(다리)을 잡고 부드럽게 돌리는 모습은 사치스럽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다시 한번 각인시킨다. 그렇다면 한국 역사에는 와인잔처럼 다양한 술잔 문화가 있을까? 알고 보면 계절과 풍류, 사랑 그리고 과음에 대한 경고까지 담았던 것이 한국의 술잔 문화다.

연인에게 복종을 의미하는 꽃신 잔

사랑하는 여인의 신발에 마시던 꽃신잔…강한 힘을 상징하는 뿔잔
사랑과 복종을 나타내는 잔도 있었다. 화혜배(花鞋杯)라고 불리는 꽃신 잔이었다. 사랑하는 여인의 꽃신에 술을 담아 마신 것. 신발에 술을 담아 마시는 것은 그 사람의 가장 아래에 있음을 의미하며, 사랑과 복종의 표시이기도 했다. 이런 문화가 있다 보니 아예 꽃신 모양 잔을 도자기로 빚어 쓰기도 했다. 1970~1980년대 운동화에 막걸리를 담아 마시는 일도 있었는데, 이는 사실 군대의 복종 문화 중 하나였다고 본다. 같은 복종이라도 사랑과 군대는 확연히 다르다.

사랑의 증표로 쓰인 표주박 잔

어릴 적 액세서리 매장에 가면 늘 연인들의 하트 목걸이를 볼 수 있었다. 오직 너와 나만이 이 목걸이를 하나로 만들 수 있다는 의미의, 하트를 둘로 쪼갠 커플 목걸이였다. 흥미롭게도 우리 역사에 비슷한 장면이 있다. 표주박 잔이다. 일반적으로 표주박 잔이라고 하면 그저 물을 뜨거나 막걸리를 마실 때 사용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아니다. 사랑의 증표로 표주박이 쓰인 것이다. 표주박을 두 조각으로 나눈 뒤 각각에 술을 따라 남녀가 함께 마셨다. 세상에 합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잔은 이 표주박밖에 없으며, 그만큼 서로 사랑한다는 의미다. 이는 혼인식 문화로 이어진다. 신랑 신부가 두 조각으로 나뉜 표주박에 술을 담아 마신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아예 은으로 만든 표주박 잔이 등장하기도 했다.

사냥 본능 상징하는 뿔잔

사랑하는 여인의 신발에 마시던 꽃신잔…강한 힘을 상징하는 뿔잔
근대까지도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동물로는 ‘소’를 꼽을 수 있다. 인간과 먹는 게 비슷한 돼지는 인간의 경쟁자로 여겨 잘 키우지 않거나, 잡아먹는 것 자체를 금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는 인간과 먹는 게 다른 것은 물론 젖과 고기가 나와 농경사회에서 없어선 안 될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 고대인들은 소를 신으로 경배하며 일반 서민은 소고기를 먹지 못하도록 했다. 그만큼 소는 신성하고 강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런 소의 뿔 속을 파내 술잔으로 사용한 것이 뿔잔이다. 일반적으로 바이킹이 자주 사용했다고 하지만, 한반도에서도 신라시대 때 성행한 잔이다. 강인하고 거대한 소의 뿔을 잡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월감을 느끼게 하는 데다 인간의 사냥 본능을 상징하는 잔이기도 했다. 뿔잔을 사용하면 탁자 등에 내려놓을 수 없는데, 그래서 일단 건배를 하면 다 마셔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과음을 경계하는 잔 계영배

과음을 경계하는 잔도 있었다. 경계할 경(戒), 가득 찰 영(盈) 하여 가득 차는 것을 경계한다는 계영배(戒盈杯)다. 이 계영배의 특징은 술을 가득 부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적당히 7부 정도만 넣어야 한다. 많이 담으면 술이 새도록 구조를 짜놨다. 이는 사이펀의 원리로, 대기압과 수압의 차이를 이용해 기울이거나 움직이지 않고 한 곳에 있는 액체를 위로 끌어올려 더 낮은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싱크대, 커피 추출기 등에도 같은 원리의 장치가 쓰인다. 계영배는 단순히 술이 가득 차는 것을 경계한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욕심이 너무 과하면 안 된다는, 과유불급의 의미가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대표적 술잔으로는 유리로 된 맥주잔, 소주잔 그리고 막걸리 사발 등이 있다. 굉장히 획일적이다. 하지만 옛 유래를 살펴보면 다양한 의미를 지닌 술잔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드라마와 영화에서도 우리 전통주와 함께 멋진 의미가 담긴 술잔의 모습을 보여주면 어떨까? 와인만 고급스럽게 나오기엔 우리의 전통문화 콘텐츠가 너무 아깝다.

명욱 <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