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퇴양난이다. 미국 요구를 들어주자니 중국이 걱정되고, 외면하자니 동맹관계가 흔들린다. 화웨이 제재 동참 요구는 아예 노골적이다. 그러지 않으면 대북 정보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압력까지 넣고 있다. 만약 동참할 경우 2017년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사태의 악몽이 되살아난다. 중국은 희토류 카드까지 만지작거리고 있다. 사면초가다. 이런 난국을 돌파할 묘수는 없을까. 역사적 사례에서 협상의 지혜를 얻어보자.

고려 성종 때 거란이 대군을 몰고 침공했다. 막강한 군사력 앞에 고려는 맞설 수도, 항복할 수도 없는 궁지에 빠졌다. 이때 서희 장군은 거란의 소손녕을 찾아가 담판을 벌인 끝에 자진 철군은 물론 강동 6주까지 되찾아 왔다. 어떻게 이런 멋진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을까.

그는 상대의 의중을 정확하게 꿰뚫어 봤다. 거란이 침공한 것은 고려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송나라 침공을 앞두고 군사력을 남하시켰을 때 고려의 배후 기습이 염려됐던 것이다. 거란의 이런 불안감을 간파한 서희 장군은 송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할 것을 약속하고 철군을 받아냈다.

내친김에 강동 6주까지 돌려받은 것은 서희 장군의 기막힌 지혜의 산물이다. 고려 조정 내 친송 강경파가 송과의 단절을 반대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소손녕에게 털어놨다. 들어 보니 말이 되는 얘기다. 소손녕은 도리어 서희 장군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조언을 구했다. 이를 놓치지 않고 서희 장군은 고려 왕과 대신들을 설득할 수 있는 ‘선물’을 요구했다. 옛 고구려 땅 강동 6주였다. 거대한 송나라 정복 야심에 들떠 있던 거란이다. 고려의 후환 제거에 도움이 된다면 보잘것없는 변방의 땅은 떼줘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서희 담판’이다.

상대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이는 협상의 기본이다. 요구가 아니라 욕구를 찾아야 한다. 화웨이 제재에 동참하라는 것은 ‘요구’다. 그 아래에는 속내가 있다. 예를 들면 미·중 패권 다툼이나 군사기밀 누출, 안보 위협 등이다. 더 복잡한 속내도 있을 것이다.

그다음에는 양측을 모두 만족시키는 대안을 개발해야 한다. 모든 안건을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고 안건별로 파고들어 중요도에 따라 주고받는 방식으로 풀어보자. 이때 여러 옵션을 개발해 상대에게 선택권을 넘겨주면 효과적이다.

한 가지 더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있다. 화웨이 제재 여파가 미치는 위해적 요소를 파악하는 일이다. 양국의 군사적 경제적 관계, 그리고 한국 기업에 미칠 악영향이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재선을 눈앞에 두고 방위비 분담과 한국 기업들의 대미 투자에 열을 올리고 있다. 제재 동참으로 한국이 겪을 고충과 이로 인해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의사결정은 피하고 싶을 것이다. 이 점을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해야 한다.

美·中 사이서 진퇴양난 빠진 韓…'서희 담판'서 타개의 지혜 얻자
그런데도 제재를 계속 요구할 수 있다. 그럴 경우 그에 대한 대가를 제공하도록 반대급부를 요구해야 한다. 협상에서는 이를 ‘스트링 기법’이라고 한다. 하나의 조건에 마치 끈처럼 다른 조건이 달라붙는 식이다. 서희 장군이 강동 6주를 반대급부로 받아낸 이치와 같다.

마지막으로 다른 국가들의 사례를 살펴봐야 한다. 우리에게만 요구하는 제재가 아니다. 물론 구글과 인텔, 퀄컴, 영국의 ARM, 일본의 소프트뱅크, 도시바 등은 거래 중단을 선언했다. 하지만 인텔 마이크론 등 미국의 반도체 회사들은 아니다. 미국 밖에서 생산된 제품의 거래를 계속하고 있다. 화웨이에 ‘미국산’ 제품 공급을 금지한다는 조항의 빈틈을 이용한 것이다.

이태석 < IGM 세계경영연구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