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반도체 수입 국가인 중국은 자국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총력’을 펼치고 있다. D램, 낸드플래시 같은 메모리 반도체에선 아직 한국 기업의 기술력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설계와 소프트웨어 능력이 필요한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선 이미 한국을 앞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中의 '비메모리 굴기'…팹리스 스타트업에 수천억 뭉칫돈 몰려
26일 중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중국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업체)는 작년 말 기준 1698곳에 달한다. 국내 팹리스(약 150곳)의 11배를 넘는다. 중국 정부가 2025년까지 반도체 분야에 최대 1조위안(약 170조원)을 투자하는 내용의 ‘중국 제조 2025’가 나온 뒤 팹리스가 가파르게 늘었다는 분석이다. 중국의 글로벌 비메모리 시장 점유율도 함께 올라갔다. 2012년 2.4%에서 2018년 5.0%까지 상승했다. 같은 기간 한국은 5.9%에서 4.1%로 추락했다.

중국의 시스템 반도체 기술력을 끌어올린 핵심 비결로는 ‘고급 인력풀’이 꼽힌다. 중국 정부는 2012년 고급 인재 1만 명을 10년 동안 양성한다는 ‘만인(萬人)계획’을 세웠다. 미국 실리콘밸리 등 해외에서 일하던 고급 석·박사 인력을 본국으로 적극 데려오고 있다.

중국의 간판 인공지능(AI) 반도체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인 호라이즌로보틱스의 최고경영자(CEO) 위카이가 대표적이다.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지멘스, 마이크로소프트(MS) 등에서 근무하다 중국 최대 인터넷 검색업체인 바이두에 합류했다. 이후 신경망 기술을 활용한 AI 반도체를 개발하기 위해 2015년 바이두를 나와 호라이즌로보틱스를 창업했다. 지난 2월 SK그룹과 글로벌 완성차업체 등으로부터 6억달러 투자를 유치해 주목받았다. 당시 평가받은 이 회사의 기업가치는 약 30억달러다.

중국 현지의 토종 전문가들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천윈지 캄브리콘테크놀로지 대표는 중국 AI 반도체업계의 스타 CEO다. 중국과학기술대를 나온 그는 국립자연과학연구소인 중국과학원에서 24세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캄브리콘테크놀로지는 화웨이가 2017년 발표한 스마트폰용 AI 반도체 ‘기린 970’의 핵심 부품인 신경망처리장치를 설계해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알리바바와 레노버 등으로부터 1억달러를 투자받았다.

한국의 반도체업계 생태계는 여전히 취약하다는 평가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만으로 창업하기엔 투자금 유치가 쉽지 않은 탓이다. 신경망 기반의 AI 반도체 업체 퓨리오사AI는 삼성전자 출신인 백준호 대표가 지난해 창업했다. 애플, 퀄컴 출신 박사급 인재 20명이 함께 일한다. 백 대표는 미국 조지아 공대를 졸업한 후 미국의 중앙처리장치(CPU) 업체인 AMD에서 일했다. 기술력과 성장성을 인정받아 네이버, 산은캐피탈 등에서 투자를 받았지만 총투자목표는 수백억원에 그친다. 백 대표는 “세계 인재와 자금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중국의 AI 반도체 산업에 비교하면 한국의 AI 반도체 시장은 초보 단계”라고 지적했다. 중국 기업들은 국내 반도체 분야 유망 스타트업에도 눈독 들이고 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