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위기를 기회로 - 창업 기업인의 꿈과 도전
(5) 고광일 고영테크놀러지 대표

대기업에서 번번이 일본에 밟힌 '엔지니어의 恨'

3D 전자부품 검사장비 11년째 세계 1위 비결
일본 넘어라 - 대기업보다 두발짝 앞선 기술로 승부
관료주의 타파 - 성과 안따지고 연구원에 무제한 권한
위기 정면돌파 - 금융위기때 R&D 대규모 투자
고광일 고영테크놀러지 대표가 뇌수술 보조로봇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고광일 고영테크놀러지 대표가 뇌수술 보조로봇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글로벌 투자 분석업체 CLSA가 선정한 세계 10대 로봇회사. 삼성 LG HP 출신들이 모여드는 중소기업. 4년 전부터 인공지능 시대를 준비한 회사.’

고영(87,500 +0.23%)테크놀러지는 일반인에게는 낯선 회사다. 주력은 전자제품 제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량을 잡아내는 검사장비다. 2002년 설립된 이 회사는 독일, 일본 기업을 제치고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세계 1위를 질주 중이다. 고광일 대표는 2002년 45세라는 늦은 나이에 고영을 창업했다. 지금도 그는 자신을 “쟁이”라고 말한다. 외골수 엔지니어다. 로봇 기술에 40년 가까운 세월을 바쳤다. 이 기술을 기반으로 개발한 뇌수술 로봇으로 내년 미국 시장에 진출한다. 그가 떠밀리듯 창업을 하고, 세계적 기업을 일군 스토리를 2008년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위기, 그리고 낙관주의

고광일 고영테크놀러지 대표가 뇌수술 보조로봇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고광일 고영테크놀러지 대표가 뇌수술 보조로봇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발(發) 금융위기가 터졌다. 이듬해까지 여파가 이어졌다. 고영의 매출도 추락했다. 임직원들은 불안해했다. 공장과 연구소, 영업팀 모두 일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고 대표는 여러 모임에서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그때 사장들 모임, 대학동창 모임이다 해서 다니는데 가는 모임마다 다 구조조정을 한다고 합디다.” 모임을 다녀와 곰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엉뚱한 결론에 도달했다. ‘세상 사람들이 바보냐, 이런 위기는 오래가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길어야 1년 반이면 끝난다.’

회사로 돌아온 그는 임원들을 불러 모았다. “우리는 지금 투자한다. 사람을 왕창 뽑고, 연구개발 더 해라. 생산은 더 투자 안 해도 되니까.”

연구원들은 따로 불렀다. “그동안 일하느라 하고 싶은 연구 못했지? 이제 여유가 좀 생겼으니 마음껏 하고 싶은 연구들 해. 어차피 이런 상황은 오래 안 가니 그때까지 여유를 즐기라고.” 직원들은 대표의 말을 따랐다. 밀린 연구, 하고 싶었던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2010년부터 세계 경제는 회복됐다. 2010년 고영의 매출은 2009년의 2.5배로 뛰었다. 고 대표는 “나는 낙관주의자다. 사람의 힘을 믿는다. 그다음부터 직원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기 시작했다”고 했다. 한때 300억원까지 떨어졌던 매출은 2017년 2000억원으로 뛰어올랐다. 금융위기 때 대대적으로 투자한 게 로봇을 활용한 검사장비 분야에서 고영을 독보적 세계 1위로 밀어올렸다.

로봇에 꽂힌 공학도, 일본을 넘어

고 대표가 로봇이라는 꿈을 찾아 떠난 것은 1980년대 초다. 고 대표는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국책 연구원에 입사했다. 월급도 많고, 업무 강도도 세지 않았다. 다른 날처럼 한가한 어느날 오후 신문을 넘기고 있었다. 광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로봇 연구원 모집’이라는 금성사(현 LG전자) 광고였다.

그는 그날 원서를 내고 LG로 옮겼다. “처음 가니 로봇이 뭔지 세미나만 했던 것 같아요. 누구도 로봇을 알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답답했던 그는 미국으로 유학갔다. 피츠버그 공대에서 공부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LG에서 성과도 냈다. 패미콤이라는 로봇 컨트롤러를 개발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늘 답답한 게 있었다.

기업가정신 하면 파괴적 혁신과 세상에 없는 제품을 통해 사람의 삶이나 시장을 변화시키는 것 등을 떠올린다. 한국에는 여기에 따라붙는 게 한 가지 더 있다. ‘극일’(克日)이다. 산업의 시작도, 경쟁도, 패배도 모두 일본을 통해 맛봤기 때문이다. 고 대표도 그랬다. 그는 “엔지니어들이 갖고 있는 한이 생겼다”고 했다.

직원들과 몇 년간 밤을 새우다시피 연구해 신제품을 개발하는 일은 일상이었다. ‘이제는 됐다’ 할 정도, 즉 일제와 경쟁할 수 있는 제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법칙처럼 일본 기업들은 곧장 한 단계 앞선 제품을 내놨다. 미리 정보를 입수해 LG 제품을 올드 모델로 만들어버리는 전략을 썼다. 판판이 당했다.

전쟁을 가로막는 관료주의

일본을 넘어서지 못한 채 고 대표는 회사를 옮겨야 했다. 외환위기가 오자 돈을 못 버는 부서가 구조조정 대상이 됐다. 사표를 냈다. 선택지는 대우중공업 삼성테크윈 미래산업 등이었다. “함께 움직이기로 약속한 ‘동지’들에게 물었더니 ‘대기업은 질렸다, 싫다’고 하더라. 그래서 미래산업을 택했다”고 했다.

질릴 만했다. 연구원들을 먹여살리려면 프로젝트를 따와야 했다. 이를 위해 사업부장 비위를 맞추고, 기획이사 연구소장 사장을 줄줄이 설득했다. 그는 “1년에 두 달은 그짓 하고 돌아다녀야 애들 먹여살릴 수 있었다”고 했다. 설득하는 사이 일본 기업들은 앞선 제품을 시장에 내놨다. 관료주의가 엔지니어들을 막아선 셈이다.

이때 정문술 미래산업 회장을 만났다. 정 회장은 설움받은 얘기를 듣더니 “당신이 오면 나는 돈 안 따진다. 연구소 차려줄 테니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해봐라”고 했다.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정 회장은 약속을 지켰다. 무제한의 권한을 받고 연구개발을 했다. 그러나 2001년 정 회장이 경영을 포기하자 고 대표는 또다시 미아 신세가 됐다. 2002년 초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안 되면 내가 한다, 창업 그리고 해외로

미래산업을 나온 고 대표는 창업을 결정했다. “다른 회사에서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내가 직접 회사를 차려 하는 수밖에 없다.”

고영을 설립했다. 직원은 2명이었다. 어떤 제품을 만들지는 결정하지 않았다. 상품을 연구개발하는 실험실에서 기획하는 게 문제라고 판단했다. 고객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파악하는 과정에서 아이템을 정하기로 했다. 그래서 영업사원부터 뽑았다. 고 대표는 영업 담당자와 6개월을 돌아다니며 LG 삼성 등 대기업 사람들을 만났다. 이렇게 3차원 측정장비 개발에 성공했다. ‘3차원 납도포검사장비.’ 인쇄회로기판(PCB)에 납이 제대로 도포됐는지 검사하는 장비다. 세계 최초의 3차원 검사장비였다.

하지만 파는 게 문제였다. 국내에선 몇 대 팔았지만 해외시장은 쉽지 않았다. 고 대표는 “아예 세계적인 업체에 납품하는 전략을 세웠다”고 했다. 독일 전시회로 나갔다. 여기서 지멘스를 만났다. 몇 달간 테스트한 뒤 고영에 주문했다. 첫 글로벌 기업 납품이었다. 지멘스가 쓴다는 소문이 나자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세계 최고의 스마트공장으로 꼽히는 지멘스 암베르크 공장에서도 고영 장비를 사용하고 있다.

세계 1위에 오르자 경쟁 업체를 따돌리는 전략을 썼다. 3차원 납도포검사장비에 대한 추격이 이어지자 ‘3차원 부품실장 검사장비(AOI)’를 선보였다. 고 대표는 “3차원 전자부품 검사장비 분야에서 11년 연속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고 말했다.

■약력

△1957년생
△1980년 서울대 전기공학과 졸업
△1982년 서울대 대학원 제어계측공학 석사
△1989년 미국 피츠버그대 공학박사(로봇공학)
△1981~1983년 한국전자통신연구원
△1983~1985년 LG전자 중앙연구소
△1989~1997년 LG산전 연구소 산업기계연구실장
△1997~2002년 미래산업 연구소장(전무)
△2002년~현 고영테크놀러지 대표


김낙훈 중소기업전문기자/김기만 기자 n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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